친정엘 내려갔다.
갱년기로 부쩍 예민해진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생각으로 서둘러 내려갔던 통에 해피를 데려
간지도 몰랐다. 혼이 빠져있었나? 어째 그걸
몰랐을까? 그러고보니 해피의 사료와 배변패드도
챙겨가지 못했다. 이 정도면 치매가 멀지 않았음이다.
난관에 봉착한 기분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해피를 안고
숨어버렸다. 젠장, 아버지가 내 곁으로 누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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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아이들의 겨울방학에 친정에 있다가 올라
왔을 때의 후일담에 대해서 엄마에게 전해 듣기로
이불이란 이불을 몽땅 내다버리셨다는 거다.
아버지께서 개 냄새가 난다는 통에 방마다 있는
그 많은 이불들과 침대커버까지 며칠 동안 빨아서
말려놓았더니 그래도 역한 냄새가 난다는 통에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에... 한 겨울에, 가운데서
애먼 엄마만 고생시킨 듯하여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방학에 다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해피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 해피는
애견이 아닌 또 하나의 어린자식, 그런 녀석을 늦은
시간동안 홀로 둘 수 없었고 술 취한 남편과 함께 둘 수
없었다. 애견 샵에 맡기려면 비용이 들고... 해서 데려
갔건만...
그런 딸에게 아버지가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다.
“너, 개새끼 위하는 마음 반만 부모에게 써봐!”
헉!!!
나이 들면 애가 된다고 했던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 부모님과는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다. 잠깐 사이
복잡한 심정과 머리가 되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해 오랜 한을 풀어 낸 후부터 그동안과
달리 상냥한 딸이 되려고 다분히 노력한다고 했건만
그걸 모르시다니, 섭섭함에 평소 특권으로 남용했던 대로
당장에라도 보따리를 싸서 돌아가겠다며 현관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내게 엄마가 저 만치서 마음을 헤아렸는지
눈빛으로 ‘네가 조금만 참아줘라.’ 하셨다.
문득,
‘그래... 내 나이가 몇인데, 내 아이들이 몇 살이야.
부모님 곁에서 언제까지 철부지 행세를 하려 그러니.
다른 자식들보다 내 눈치를 많이 보신 아빠 셨는걸...
이제 아들, 며느리 눈치가 보이지만 하나뿐인 딸이 제일
편하다고 하셨는걸... 뭔 때마다 자식들 챙기느라 제대로
찾아뵙지 못했으면서 이제 위생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저리 싫어하는 애견을 이유로 섭섭하게 해드려선 안되지...‘
강하다 믿었던 내 부모님도 세월 앞에 무릎을 꿇어 가심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긍~, 아빠!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 담엔 꼭 이놈의
개새끼 집에다가 두고 올게. 화 풀어. 그럼 이걸 어떻게 할까?
아빠가 말씀만 하셔.“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말씀드렸더니 언젠가 시도하려다
나의 식음을 전패시키게 만들었다가 실패로 일단락 됐던
이사짐 센타에서나 쓰는 프라스틱 박스를 냉큼 들고 오셨다.
그리고 꼼꼼하게도 녀석이 밀고 다닐 것까지 생각해서
그 위에 올려놓을 쌀자루까지 챙겨오셨다.
자진해서 어리벙벙해하는 해피를 그 좁은 우리에 가뒀을 때...
아영이가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해를 시키기 위해 설명을 하고
달랬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끝내 혼까지나고서 더 많은
눈물을 흘린 딸에게 표내지 말고 닦고 나오라고 일렀다.
어쩌다보니 파라다이스라고 여겼던 친정까지 눈치를
살펴야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처연한 심정한편으로
그것이 제대로 된 궤도가 아닐까, 각성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생글거렸던 그날 이후부터 친정엔 해피를 떼놓고
다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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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쩌다보니 또 다시 해피를 데려가고 만 것이다.
이불을 버리는 꼴을 또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또 가둬둬야 해?
많은 공간을 나두고서 아버지는 왜 내 곁에 누우셨단
말이야?
불만과 불안으로 깜빡 잠이 들었건만 밖이 소란스러워서
깨게 되었다. 문밖에서 성질 급한 아버지께서 농사일을
얼른 서둘러야 한다며 바삐 다녔고 동생들과 남편이
그 곁에서 함께 우왕좌왕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여전히 해피를 안고서 감추기에 급급한 나는 뭘 도와드려야
하나, 알아보기 위해서 일어나려는데 거실 안으로 모르는
사람들 몇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워낙 손님이 많이 찾는
집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쓰고 있던 안경이 없었다. 여전히 해피를 안고서
찾기에 급급한데 누군가,
“이것이 맞아요? 어떡하지... 내가 모르고 깔고 앉아있었어요.“
하며 건넸다.
뿔사, 안경다리가 잔뜩 틀어져버려서 잘못 만지면 부러질
형태가 되어있었다.
안 돼는 사람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나를
두고 한말인가보네. 어째 있는 자리마다 마음이 편한 곳이
없고 편한 상황이 아닐까... 죽어라, 죽어라, 하는 구나.
망연자실, 애처럼 울고 싶은 마음으로 한 손에는 해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휘어진 안경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니... 다행이다.
이건 뭔 뜻을 품은 꿈이란 말인가.
해피를 안고 있었으니 개꿈인가?
그럼 휘어진 내 안경은 뭘 뜻하는 걸까?
왜 그것을 꿈인지 몰랐을까? 숨은 그림처럼 꿈 속에서
남편이 아버지를 거들겠다며 이쁜 짓으로 허둥대고
숨어있던 것을...
오늘 저녁 늦게나 내일 아침 일찍이 처갓집엘
내려가게 된 남편이 약속을 잘 지켰으면 좋겠다는 걱정
때문에 꾼 것일까...
스님께서 꿈에 연연하지 말라고 일렀던 옛날 말씀이
있으셨건만... 내가 여러모로 나약해진 것은 사실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