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상에서였다.
자식들에게 난 책임감을 부여하며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키웠다며 자부했던 것이 내 자만심이었음을 깨닫고
벽에 부딪힌 마음이 될 때가 종종 있다. 그 중 하나가 밥상머리에서였다.
생선과 마주한 녀석들의 젓가락질이 늘 고군분투다. 어리 때부터 길바닥에
넘어진 녀석들을 단 한 번도 일으켜 세워준 적 없는 냉정한 내가 안쓰러운
마음에 도와준 것이 화근이 된 듯하다. 그건, 그동안 늘 나보다 더 세심하게
가시를 발라서 밥숟갈 위에 올려주곤 했던 남편의 탓도 가세해 있다.
일없는 날이면 식사 때와 화장실 가는 일 빼곤 늘 tv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이
일과의 전부인 남편은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법을 몰랐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며, 아쉬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가지가, 언제 어디서나 식사자리가 있는 음식 앞에서만큼은 타에 모범적으로
가정적이고 자상한 아빠라는 것.
남편은,
고기 집에선 고기를 알맞게 굽고 먹기 좋게 잘라서 접시에 담아내서 식기 전에
우리들이 먹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해주곤 했다. 그리고 치킨을 비롯한
두 다리를 지닌 몸(?)구조 조류를 요리한 음식 앞에서 공평하게 분배하여
내 몫과 아들 몫으로 챙겨주고 불만을 갖기 전에 살찌면 안된다며 퍽퍽한
가슴살을 얇게 떼 내어 딸의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남편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늘 부족해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은 풍요로운 여유로움이 묻어있었다.
그랬던 남자가 아침상에 놓인 갈치를 이기적일만치 혼자만 발라서 먹는 거였다.
멀뚱멀뚱 그 모습을 야속한 듯 바라보는 아영이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모른 척
익숙한 솜씨로 하얀 속살을 발라서 가시만 남겨놓은 채로 계속해서 자신의 입만
챙기고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 저도 주세요.”
“네가 먹어! 넌 손이 없어?”
딸의 볼멘소리에 매정하게 대꾸하는 남편의 모습이 나도 낯설었지만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켠 tv 속 화면에 차체가 완전히 파손된 차량사고의
방송모습을 담아 전하는 뉴스를 보며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에, 한마디
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있었다. 낯선 아빠의 배반된 행동에 이윽고 아영이의
눈가가 불거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입에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는
곧 오기 담긴 얼굴이 되어 보란 듯이 맨밥을 꾸역꾸역 먹어 댔다.
그런 딸에게 내가 대신 가시를 발라서 밥숟가락 위에 올려놓아주었다.
“안 먹어요!”
고집불통 표정된 딸이 젓가락으로 집어든 갈치 살을 형제를 잃어버린
갈치뼈대 위에 되돌려놓는 거였다.
“이놈의 기집애! 발바닥을 매로 때려줄까 보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편이 발끈하여 퉁명스런 말을 뱉어냈지만 평소에 목청
큰 나는, 묵묵히 부녀의 모습을 솟구치려는 화를 눌러 참고 지켜보다가 겨우
한마디 한 것이 아침이니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밥공기를 깨끗이 비운 남편이 먼저 자리를 일어서며 안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전히 한마디 했다.
“저 놈의 계집애 살 발라주지 마. 언제까지 해줄 거야. 이제 5학년이야.
옷도 제가 챙겨 입게 해.“
제 아빠가 일침을 가한 말에 제대로 복받치고만 아영이가 소리 없이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고 입으로 들어가는 숟가락은 맨밥을 고수한 채로
밥사발과 딸의 입으로 왕래를 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빈이 녀석이 성질이 불같은 제 엄마의 표정변화를
눈치를 살폈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고처럼 동생에게 한마디 하고
제 방으로 향했다.
“하여튼, 눈치 없는 기지배. 넌 꼭 혼날 것을 알면서도 고집부리더라.
난 몰라, 혼나던지 말든지...“
폭풍전야처럼 고요해진 밥상에서 딸과 둘만 남은 난 미동도 하지 않고
활화산이 되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여념 없어야했고 겨우 입을 열수가
있었다.
“화장실 가서 눈물 닦아내고 나와. 다시 나왔을 때도 눈물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아. 흔해빠진 눈물 오늘 완전히 쏙 빼내기
전에...“
내 말에 따르고 다시 자리에 앉은 아영이가 밥숟갈을 떴을 때 난 다시 흰
갈치 살을 올려주었다. 저도 고집이 있다는 듯 뜬 수저를 내려놓지도,
입으로 가져가지도 않은 모습으로 정지해있는 딸을 몇 초 동안 지켜보고
또다시 입을 열어야 했다.
“네가 좋아하는 생선이 갈치라고 했어. 비싼 것을 생각해서 구워준
엄마의 성의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이거 안 먹으면 누구 손해야.“
“저요...”
여전히 불만이 담긴 목소리로 대꾸한 행동 또한 요지부동인 딸이었다.
“그럼, 앞으로 그 손해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냐?”
“......”
“그게 아니라면 먹어. 세상 살아가면서 잇속을 챙기지 못할망정 손해는 보지
말아야지.“
그 말에 밥숟갈이 겨우 딸의 입으로 들어갔지만 눈이 다시 촉촉이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내 고집이 못지않은 딸의 기를 꺾은 것같이 되어버린 상황이
편치 않았기에 아빠에게 맺힌 딸의 맘을 풀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아빠가 생선을 혼자만 발라서 드신 적이 있었니?”
내 말에 음식을 씹으며 아영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없었어. 아빠가 충격을 좀 받은 일이 있으셨대. 엄마도 새벽에야
알았어. 어제 저녁에 일마치고 돌아오는 도로에서 차 두 대가 급하게
아빠를 추월해서 나가더니 앞에서 충돌을 일으켰단다. 충돌이 있던 차 한 대가
튕겨져 나오면서 가드레인에 심하게 또다시 부딪혔고 그 차가 다시 아빠 차
앞으로 굴러왔대. 아빠가 서행하지 않았다면 크게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놀라서 도저히 운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올라오셨단다. 그 순간
아빠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빠는 하룻밤이 지난 지금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네가 이해해봐. 그리고 아빠가 무슨 마음으로 저러실까
너도 생각 좀 해봐.“
내 설명에 눈이 동그래진 딸이 그제서야 아빠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풀어진 얼굴이 되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었는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있던 아들이 문을 벌컥 열면서
“엄마, 그게 정말이에요? ”
놀란 목소리로 묻는 말도 들어야 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 남은 말을 이었다.
“니들 잘 들어. 니들은 엄마, 아빠가 다른 집 부모들보다 못하다고 불만들을
마음속에 담고서 살 수도 있을 테지만 누구 못지않게 사랑 받으며 산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될 거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니들 나이에 젓가락질이 서툰 것이
하나의 증거다. 하지만 엄만 오늘 니들을 너무 잘못 키운 것을 실감했어.
남을 배려하라고 가르쳤지만 니들 입만 아는 이기적인 자식들이 된 것 같고
책임감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자립심이 부족한 너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들 엄마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들 좀 해.“
등교준비와 학교생활에 임할 마음자세를 위해서 가까운 학교를 곁에 두고도
정확한 7시에 밥상에 앉히고 마는 나의 고집에 때론 볼멘소리로 다른 아이들은
8시에 일어난다는 푸념들을 늘어놓아도 받아주지 않고 지금껏 키웠던 아이들에게
시간은 금이라는 잔소리와 함께 나약한 정신력을 탓하곤 했다. 그런 나를 주위에선
가정의 엄마가 아닌 군대에 선임하사냐고 탓하며 안쓰러운 아이들을 두둔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획과 규칙이 없는 제 아버지를 바라보며 자라야하는 아이들이 안일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까봐 난 굽힘없이 내가 세운 규칙을 지켜왔다.
그런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서 나는 더한 노력을 해야 했다.
척추장애 5급인 제 엄마가 그로인해 크고 작은 수술을 받으며 흉터로 만신창 된
몸으로도 저희들을 데리고 목욕탕을 다녔고 학교에서 임원으로 봉사하며 체력단련과
절약을 위해 웬만한 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을 맞서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랐다. 그런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너희들도 강해야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인고의 세월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감사하게도 엄마를 자랑스러워
했고 기죽지 않았으며 엄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썬다고 해도 그 가능성에
이의를 재기하지 않고 수긍하는 자식으로 자라주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를 옹호하는 말로 이해를 시키는 말들을 열거할 때마다
나또한 내게 필요한 마음정리를 해야 했다.
건물의 설비가 직업인 노동자 남편이 추위와 더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설비일로 공사장을 돌아다니면서 운전대를 잡으며 때론 아찔했던 순간을
경험해야했고 현장 난간에서 몸이 곤두박질치거나 추락한 자재로 인해, 또는
날카로운 녹슨 쇠꼬챙이에 찔리며 크고 작은 부상들을 경험했던,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에서 죽음의 순간을 맞닥트리기도 했다던 남자는 때마다 등한시했던
가족들의 얼굴이 제일 먼저 아른거렸다고 했다.
“내가 없으면 내 가족 어찌되는 거야?”
안쓰러운 마음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 경험이 있은 후면 가장으로써 책임감을 부여받은 듯 자상한 남자가
되고자 노력하기도 했지만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남편과 세월의 강줄기를 함께 타고 흘러오며 그와 함께한 시간이 거듭될수록
멀쩡한 사지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그를 이해할 수도,
그렇기에 의지할 수도, 기댈 수도 없는 마음으로 상처를 안고 살았다.
내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남자가 하는 말이 내 귀와 마음을 닫게 했기에
그를 향한 내 눈 꼬리는 곱지 않았을 것이다.
17년을 함께한 지금에서야 그랬던 나를 인정하게 된 것 같다.
세상에서 술과 제일 각별한 남편이 기뻐서 마셔야 했고 슬퍼서 먹어야
했고 힘겨워서 담아야 했다던 핑계를 대며 입버릇처럼 ‘미안해’를
남발할 때 내 마음이 그를 향해 점점 튼실한 바리케이트를 치며 홀로서기를
준비했던 나.
매사에 의욕 없이 인생의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거스르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나약한 남자의 모습을 대하기가 싫을 때마다 한 공간에서 거주하는 그는 내게
동반자가 아닌 적일뿐이었다.
어쩌다 저런 남자를 만났을까... 내가 찍은 발등의 아픔과 어리석음만을
탓하고만 싶었던 지난날의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내겐 긴 수행과도 같은 여행이었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괴로움에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발악을 했던 지난날을 지금은...
더 이상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현재의 내 마음가짐이 힘겨운 역경을 예감하며 여전히 때때로
인생을 가시밭길로 여기며 주춤거리기는 변함없지만 그동안 찢기어 피가 나고
고름이 흘러넘쳤던 자리에 새살이 돋고 굳은살이 자리하는 것을 느끼며 좀은
무뎌진 듯 흘려버릴 수 있게 되는 것들이 늘고 있음이 감사하다. 외유내강이 뭔지
새삼 맘속으로 새기며 참뜻을 헤아려가는 나를 대하기도 한다.
두렵긴 마찬가지다. 아직 남은 우리들의 앞날이... 하지만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며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찾은 목표의식이 자리해 간다.
내가 이런 맘이 되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공감하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마음자리를
만들어 준 남편과의 만남을 그래서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궁핍한 가정에 태어나 홀어머니 곁에서 안겨 본 기억조차 없이 북새통 7남매
중에 다섯째로 존재감 없이 살았다던 남편이기에 더 악바리처럼 열심히
살아가야 정답이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받아본 적 없다던 아버지의 자리를
완벽하게 자리매김해주길 바랬던 마음도 이제는 접어가고 있다. 그 외에
남편에게 바라던 또 다른 내 욕심들도 정리해 가고 있다. 이것이 어떤 정의를
내린 것인지 나조차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정리가 포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환경에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나약한 남편에게 어쩜 완벽만을 원하며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내가 벅찼을지도 모른다는 되돌아 본 지금의 내 마음.
남편이 가족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며 턱없이 부족한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덕에
염치불구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야했지만 그는 감사한 마음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괜한 자존심과 보수적인 사고로 살아오며 피의자 아닌 피해자로 살아왔을지도
모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족에게조차 신용을 얻지 못하는 남편이 여전히 제 기분에
따라서 아이들에게 들뜰 약속들을 제시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상황에
따라서는 번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당당히 통보하는 것을 지켜보며 실망한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야 하는 것이 여전히 내 몫으로 넘겨지곤 했지만
앙금을 남기며 탓하지 않으련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분명 뜻이 있는 것이리라 언제고 아직 풀리지 않은
내게 존재한 의문에 답이 내려지는 날이 도래할 수 있길 바란다.
때때로 인생의 가시밭길에서 넘어져서 생긴 생채기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울부짖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길을 가고자 한다.
투덜대고 험한 말을 뱉어 낼지라도 이탈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그럴 수 있길 바란다.
“우리 신년에는 동해가서 해 뜨는 것 보고 오자.”
올해를 맞기 전에 했던 약속을 어긴 남편이 봄 방학을 앞뒀던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날 잡아서 미국에 있는 하와이는 못 다녀오더라도
옛날에 다녀왔던 부곡하와이 온천은 꼭 가서 몸 담그고 오자.“
했던 약속까지 여지없이 어기고만 사람이 또다시 기필코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한강고수부지 자동차 극장을 다녀오자던 약속 또한 지키지 못했지만 겉모습은
여전히 태연했었다. 그런 제 아빠에게 여전히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
안쓰러운 딸이 얼마 전에,
“아빠! 나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고 싶어요.” 했던 말에,
“그래.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꼭 데려갈게.” 호언장담하는
말을 시트콤처럼 지켜봐야 했던 나였지만 치켜 올라갔던 눈 꼬리에 힘이 좀은 풀어진
오늘 날의 나를 값지게 여기고프다.
생선을 매정한 모습으로 홀로 먹었던 남편의 그나마 존재하던 자상한 모습이 사라진
것에도 분명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거라는 짐작으로 그래서 그에게 난 오늘 토를 달며
이해시켜주길 바라지 않았다.
이 마음이 된 나를 응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