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린 보일러실 문밖에서 졸지에 보초를 서고 있던 내게
그 많은 부품들을 분해하는가 싶더니 다시 차례대로
조립해서 원상태로 만들어가는 사돈의 모습이 한때
뭇 여성의 로망이었던 한 외화시리즈의 주인공 <맥가이버>를
연상케 했다.
온기 없던 곳에서 2시간을 떨고 나서야 형체를 잃었던 보일러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소리 없이 침묵하던 보일러가 ‘웅웅...’ 몇 번의 힘겨운 숨을 토해내더니
곧 ‘쿠웅...’하는 우렁찬 제 목소리를 찾게 되었다.
“됐습니다. 이제 곧 집이 따뜻해 질 겁니다.”
다시 제 역할을 하게 된 보일러를 좀 더 이곳저곳 살피던 사돈이
자신도 뿌듯한지 말하는 목소리가 명쾌했다.
몸을 일으키며 문밖을 나서기 위해 들고 왔던 연장통을 챙기는
사돈의 손에 묻은 기름때가 칠흑의 어둠에 묻힐 정도로 검정색을
띄고 있었다.
“추운데 고생하셨어요... 가서 얼른 닦아야겠어요... 부모님이 계셨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대접받았을 텐데... 커피 좋아하시면 자판기 커피라도
한잔 사드릴 의향은 있는데요...“
그의 수고로 집이 다시 온기를 되찾게 되었다니 고마웠다.
추위 속에서 고생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바닥에 비췬 후래쉬의 불빛을 받고 현관 입구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노랑 백열등을 등지고 선 사돈이 고른 치아를
들어내며 소리 없는 웃음을 얼굴에 떠올렸다.
그리고 장난기를 담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집 커피 아니면 안 먹어요.”
밤의 묘한 마력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악마가 만들어 놓은 마수에 걸려든 걸까...
중늙은이처럼 보였던 그동안의 사돈 얼굴이 그 순간만은
풋풋한 10대처럼 비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주고받은 말 몇 마디에 어색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에 대한
경계를 완전하게 해제 한 것은 아니었다.
넘쳐나는 사랑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자랐다면 고질적인...
나의 내면속의 사포처럼 까칠함도 없었을 것이고 날카로운 가시들로
얽히고설킨 경계같은 철조망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난...
많지 않은 나이에 그동안 보고 겪은 불행들과 인간들, 상처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병적으로...
나는 잠시 흐트러졌던 마음을 곧추세웠다. 냉정함을 다시 찾은 나는 언제나처럼
까칠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타깝네요. 고마운 마음에 그거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부모님께 오늘 일 말씀드릴게요. 아빠께 집 커피를 대접
받으시던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뭔가 보답을 받으세요.
밤도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서 쉬셔야지요.“
내 말에 사돈이 머쓱한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돌아갔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아버지와의 교대가 두 번쯤
더 이뤄지고 났을 때였을까... 또 보일러에 이상이 생겼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멀쩡하게 잘만 돌아가던 보일러가
장난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만 집에 오면 침묵으로 시위하니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약 오르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언니에게 전화해서 구원 요청을 했다.
형부란 작자가 보일러 설비 일을 떼려치우고 사냥꾼으로 전업을
하려는지 또 숲 속으로 들어갔다며 언니가 투덜거렸다. 삼촌을 보내겠다나...
알았다며 침울한 언니에게 내가 한마디 해줬다.
“형부를 너무 방목하는 거 아냐? 언니도 총 하나 구입해서 같이
따라다니지... 그렇게 입만 댓발 나와서 투덜대지 말고 말이야.“
“그럼 선영이는...”
“업고가. 사냥꾼 아버지를 뒀으면 그것도 일찌감치 산을 배워야지.
멧돼지를 친구삼고 고라니를 동생삼아 뛰어놀라고 해. 배고프면
잡아먹고... 뭐, 형부는 갓 잡은 그것들의 신선한 피를 먹기 위해서
빨대를 수시로 꼽는다며... 잘됐구만 주스 살 필요 없이
자연을 먹고 입고 거닐면서 사는 것도 선영이한테 나쁘지
않을 거야...“
“ㅎ ㅎ ㅎ... 하여튼 내가 너를 어찌 당하겠냐?”
-언니는 태생이 낙천적이었던 것 같다. 늘 웃었다. 그 힘겨웠을
상황에서도 혼자 조금만 투덜거렸고 형부 앞에서는 늘 헤헤,
바보처럼 잘도 견뎠다. 난 언니에게 왜 그러고 사느냐며 간간히 만나면
지랄 좀 떨라는 충고(?)을 했었다...
언니는 지금 형부의 배신과 버림을 받고 법원에 이혼 서류를 제출했다.
조정기간에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친정에서 듣게 되었다.
이모가 돌아가시고 바람기 다분한 일생에 도움 안되는 친정아버지는
있으나 마나...
한때 언니가 잘 나간다며 뻥뻥 되길래 이럴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딴 주머니 좀 차라고 했었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듣더니... 언젠가 주리를 틀어도 열두 번도 더 틀고 여섯
토막을 내고서도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패고 나서 냉동실 안에서
땀나도록 밟아 죽여도 시원찮은, 한때 내가 형부라 불렀던 놈이 어떤
잡년과 눈이 맞았다며... 그래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소식을 접했었다.
뭐 낀 놈이 성낸다고 현장을 잡기 위해서 찾아간 언니 앞에서 제 몸에
자해를 하더니 112에 신고를 해서 처에게 맞았다며 고소를 취해
언니가 늦은 밤 유치장으로 끌려가며 내 엄마에게 연락을 했었단다.
그곳에서 며칠을 있었다니... 그 소리를 시간이 흘러서야 듣게 된 날,
나는 그 개보다 못한 놈을 욕하기보다는 언니를 욕했다.
등신 쪼다 같은 년... 믿을 놈이 따로 있지... 등신...머저리라며
이를 갈았다. (남편과의 인연으로 그 더러운 놈이 나의 사촌 시숙이 되어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려운 관계를 맺고 말았다... 인생 참... 더럽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참았다... 연락을 할까, 하다가도 참았다.
똑똑한 언니였다. 영혼이 맑은 언니였다. 재주도 많은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망가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등신...
내 주제에... 내가 뭘 잘나서... 어쩌면 그 삶을 그대로 따라갈지도
모르는데... 그런 더러운 인간의 피를 나눠가진 남편이란 작자에게
난 그래서 마음을 못 여는 건지도 모르겠다...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나의 고질병 중 또 하나...
꼭 삼천포를 제집 드나들듯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고쳐 질라나...-
둘만의 두 번째 만남을 역시나 작은 보일러실 문 앞에서
갖게 되었다. 사돈이 먼저처럼 어색한 침묵을 깨고 이것저것
말들을 늘어놓았고 호응을 원하는지 내게 질문들을 열거했다.
사돈은 한번 살폈던 기계라서 그런지 처음보다 시간을 단축시켜 보일러의
숨통을 틔어놓았다.(남편에게 의심이란 것이 생기기 시작하게 됐을 때...
나는 이 부분마저 의심하게 되었다.내 의심이 맞는다면 이 인간... 참 치밀한
인간이다... 그 좋은 머리로 제 삶을 발전은 왜 못 시켰는지...)
자꾸만 말썽부리는 것 보니 보일러 수명이 다한 건 아니냐는 내 질문에
사돈이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난 아버지에게 보일러의 교체에
대해서 논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쌀쌀한 바람이 힘도 넘치게 불어재꼈다. 며칠 전 잔뜩 왔던 눈이 쌓인
곳곳에서 환한 달빛을 받아 문스톤처럼 하얗게 빛나는 밤...
사돈에게 ‘수고하셨어요.’ 하며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다. 그때 사돈이,
“선영이 이모, 오늘은 자판기 커피가 땡깁니다. 한잔 사주시겠습니까?” 한다.
알았다며 내가 앞장서서 도로변인 우리 집 건너 길에서도 조금 밑으로 위치한
곳까지 걸어갔다. 그리곤 가로등 불빛 환하게 켜진 자판기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려고 했다. 그때 사돈이 움직임도 잽싸게 동전을 몇 개
넣고 커피를 뽑았다.
“왜요... 제가 사주려는데.”
머쓱해진 내가 말했다. 사돈이 또 가지런한 치아를 들어 내놓고
웃으며 대꾸했다.
“누가 사면 어떻습니까? 마시기만 하면 돼지.”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들은 내가 사돈의 커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커피가 나오자 ‘잘 마실게요.’, ‘수고 하셨어요.’라는 인사말만
남기고 집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왜 벌써 갑니까?”
세찬 바람에 날리는 사돈의 굵직한 고음에 내가 뒤로 걸으며 말했다.
“여기서 그동안 있으면서 느꼈는지 모르겠지만요, 여기 분들이
남의 일에 아주 관심들이 많거든요! 난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거라면 딱 질색이구요. 이 밤에 둘이 있는 것 보기 좋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대꾸에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바람에 날려 잘 들리지
않았다. 난 그에게 되묻지 않고 몸을 돌려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사돈이 수원에 있는 슈퍼까지 보일러를
손보기 위해 한번 들른 적이 있었다.
-당시 내 가게에 오는 남자 손님 중에 하나가 청학동에서 막 하산한
사람처럼 머릴 길게 길러 묶었고 염소수염과 흡사한 것을 턱밑으로
기른 산만한 얼굴에 낡은 계량한복을 걸치고 검은 고무신까지 신은,
엽기의 도를 넘어서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주 들렀고 값싼 빵과 우유를 값을 치르고 오랫동안 한쪽에 앉아서
먹곤 했다. 손님을 왕처럼 대하라는 엄마의 충고에도 사람에 따라서
충동을 억제치 못하고 대했던 나는 그만 오고나면 소금을 한바가지씩
뿌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곤 했다.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들도
철학이랍시고 알 수 없는 희한한 것들만 꺼내놓았다. 내가 봤던 그는
슈퍼 구석에서 우유와 빵이 아닌...깊은 산 굴 속에서 솔잎과 이슬을
먹고 살아야 적합한 사람이었다.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우유란다...
간식으로 육포를 즐길지도 모를 위인이었다.
엄마는 그의 출현에 못마땅해서 방으로 들어가곤 했던 내게
그가 미술 학원에 선생이라고 했다. 나이도 생각보다 적단다.
그 엽기남이 내게 언젠가 진맥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싫다는 나를 엄마는 굳이 끌고 가서 그의 앞에 앉히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에혀... 겉은 20댄데... 속은 환갑노인이 따로 없네...”
손금과 관상을 본다던 그가 내게 말했다.
“음... 성질 보통 아닐세...재복은 있고... 궁합이 나랑 딱 일세 그려...”
한 번씩 제자들과 들어와서 무게 잡고 있던
작자가 제자들만 나가고 나면 정신 나간 희한한 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엄마는 그 사람을 재밌어 했지만... 난 영... 거시기 했다.
한 날은 작품을 가져왔다며 화선지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산이 달랑 하나에 둥근 보름달을 붓으로 대충 그린 것을...
미술학원 강사라는 양반이 내가 발가락으로 그려도 그보다 나을
낙서 쪼가리를 그림이라며 낙관까지 찍어 건넨 것을 그가 보는
데서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덤덤하던 그였다.-
가게 안 안쪽으로 난 부엌 쪽에서 보일러를 손보고 있던 사돈 곁에
엄마가 함께 있을 때 때맞춰 엽기스런 학원 강사가 들어오더니
언제나처럼 빵과 우유를 들고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또 주접떨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 같이 사겨나 봅시다...”
그 소리에 부엌에서 사돈과 있던 엄마가 불쑥 튀어 나왔다.
난...똥이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놈의 똥파리들만 꼬였던 것을 보면...
성질 더럽고... 인생도 더럽고... 꼬이는 것들까지 구리고...
비유할 거라고는 똥밖에 없으니...참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