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같아서는 전처럼 활동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몸은 두 번의 큰 수술의 후유증으로 쉽게 지쳤고
작은 충격에도 척추를 통해서 느껴지는 커다란 통증을 남기곤
했다. 이러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 어떡하나...무기력한
나를 느꼈다. 건강한 몸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책임지며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친구들과 내 자신이 점점 비교 되면서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도 느꼈다. 친구들의 연락도,
찾아오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내 스스로가
친구들에게 거리감을 만들면서도 외로운 것은 나뿐인 것만 같았다.
조카 선영이로도 애견 ‘큐피’로도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점점 나는 작은 일에도 짜증을 냈다. 어린 날도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을 22살인 성인이 되어 부모님께 부리곤 했다.
그런 딸을 엄마는 때론 ‘우리아기’라며 장난처럼 동네를
업고 거닐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누가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선영이 삼촌 일행들과 가끔 동네를 거닐다가 만나기도 했고
옥상에 올라있을 때도 마주치기도 했다.
마을 중간쯤에 위치한 도로변의 우리 집은 바닷가로
차를 몰고 오던 사람들이 돌아가던 길에 멈춰서 우리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갈 정도로 마을에 흔치 않은 빨강벽돌로 지여진
양옥집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무 대문 밖으로 넝쿨나무 두 그루를
심어서 울창하게 가꾸셨고 집을 둘러서 반은 기와를 얹은 담장을
나머지 반은 과실나무들로 울타리를 세워서 가꿔 놓으셨다.
92년도였던 그 시기에 지어진지 횟수로 2년째인 우리 집 모습은 요즘의
잘 가꿔진 별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내 방 창문 밖으로 이모네 집이 바로 보였다. 운수업이 부도가
나버린 이모네는 집과 바로 옆으로 5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민박집과
식당을 함께 꾸려가셨다. 막차를 운행하여 들어 온 기사들의 숙박과 그들의 식사들을
챙기시며 생계를 이어가셨다.
9시가 조금 넘으면 이모네와 우리 집 사이에 있는 제법 넓은 공터로 막차로
들어온 직행과 완행버스 4대가 나란히 들어와 주차되곤 했다.
밤 8시도 안돼서 꿈나라로 빠지는 부모님과 중학교 2학년생이던 막내
동생과 달리 예민했던 나는 차들이 모두 들어와서 조용해 질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침대의 스탠드를 켜놓고 책을 읽거나 병원에서부터
낙서처럼 쓰기 시작한 일기장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론 오디오의 볼륨을 약하게 켜놓고 팝송을 듣기도 하며
가족중에서 가장 늦게 잠이 들곤 했다.
겨울이 가까운 계절이라 창문을 닫아놓고 있던 것 같다.
어느 밤이었다.
침대에 누워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챙!...
창문유리로 모래보다 조금 큰 돌맹이가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했다. 아니면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작은 모래알이 날아와 부딪쳤나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책을 읽고
있던 것 같다.
챙!!...
좀 전보다 알맹이가 조금 더 큰것 같은 무언가가 날아와서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뭐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선영이 이모... 선영이 이모...”
밖에서 주변을 의식하듯 작은 소리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보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선영이 이모... 창문 좀 내다 봐요...”
남도지방의 강한 사투리 억양으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은 귀에 익었다. 선영이 삼촌이었다. 늦은 밤에
사돈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창문을 내다보지 않고 스탠드의 불을 꺼버렸다.
무슨 일일까... 왜 사돈이 나를 부르는 걸까...
서로 마주치면 고개 인사만 했을 뿐, 우리는 말을
섞은 적도 없었다.
언니는 나에게 선영이 삼촌이 묵는 곳이 민박집이라고
자신의 집에서 먹고 자는 것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지
놀러오라고 했다. 마을에 하나뿐인 민박은 막차들이
들어오면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내 창문과 바로 보이는,
거리로는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촌형부의 설비 일을 돕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선영이 삼촌과 나와의 첫 대면이 있던 날 언니와 나눴던 얘기가
있었다.
“선영이 삼촌이 여기 내려와 있으면 그 아내는 편하겠어.
밥도 안 해줘도 되고 말이야.“
“야, 그 삼촌 아직 장가 안 갔어.”
“뭐? 나이도 되따 많게 생겼던데?”
“안 많아. 얼굴이 타서 그렇지. 29살인 걸?”
“헉!!!... 29살이 왜 그렇게 삭았어? 난 한참 아저씬 줄 알았지.”
“ㅎ ㅎ ㅎ... 그래? 내 눈에는 어리게 보이는데... 이상하네?
생긴 것도 잘 생겼잖아.“
“그려, 언니 눈이 그리 낮으니까 형부같은 사람이 좋다고
결혼해서 살고 있겠지.“
“뭐? 형부가 어때서? 얼마나 인물이 잘났냐? 민욱이보다
훨씬 났다. 그런데 요즘 민욱이 왜 안 오냐? 둘이 뭔 일
있었어?“
“민욱이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내 눈에는 나와 7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던 선영이 삼촌이
40살도 더 된 것처럼 보였다. 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와 늘 츄리닝과
운동화 차림으로 허름하게 다니는 사돈이 총각이라는 것에
놀랐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조금 불편한 사람일 뿐이었다.
불편하고 어려운 사돈이 나를 부르던 밤이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키스사건 이후로 한 달이 조금 넘어서 나는 민욱을
용서하기로 했다. 친구들보다 만만하고 편했던, 그리고 내 자존심을
건들지 않던 민욱을 처음 친구로 받아들일 때도 무료함을 달래고픈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됐던 것처럼 처음 만남 때보다 더 많은
외로움과 무력감에 빠져서 헐떡이는 심정이 되어버린 나는 뭐든지
받아들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착한 민욱을 역시나 불만들을 풀어내고
싶은 상대를 찾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민욱이 일하는 직장에 전화를 걸었다.
“다시는 그런 짓거리 안 할 거지?”
“응... 정말이야... 안 해.”
“우린 친구야. 친구 이상이 절대로 될 수가 없어.”
“그래, 우린 친구야.”
“난 형을 이용하는 거야. 정말 심심하고 나가고 싶어
죽겠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치겠어. 나 좀 숨통을 틔워줄
사람이 필요해. 그게 형이라고 생각했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어. 형이 해줄 수 있어? 기분 나쁘면 지금 관두고.“
“아냐, 안 나빠. 네가 연락을 줘서 난 너무 기쁘다.
난 네가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그런 기대를 하고 나를 만난다면 다음에 또 그 짓거리
할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려.“
“아냐. 맹세해... 네가 나를 친구로만 만나겠다면
난 네 친구로 곁에 있을 거야.“
"왜 그러고 싶은데? 기분도 안 나빠? 내가 못되게 구는데?“
“기분 안 나빠... 난 네가 좋아. 그 이유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정당함으로 포장하고픈 마음으로
민욱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은 것 같다.
참 못됐었다...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