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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여행(4)-마지막편


BY 솔바람소리 2008-11-21

언제 한번 동해로 놀러오라는 말씀을 끝으로 큰스님과 헤어졌다. 다시 왜관의 포교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리는 떠나기 전보다 더 복잡해져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도 이룬 것이 없는 나를 깨우쳐주신 큰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나와의 오늘 이런 만남도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테지요.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보입니다. 훗날 나와의 이런 만남을 보살님처럼 힘든 분을 만났을 때 경험담으로 전해진다면 나 역시 오늘 이 자리에서 했던 얘기들이 헛되지는 않겠지요....”


그 말은 곧,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 훗날을 기약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뼈있는 말씀이셨을 것이다.


“보살님, 언젠가 얘기했었죠? 잔잔해 보이는 바다의 물 밑도 매서운 소용돌이가 늘상 일고 있다고, 잔잔한 바다의 한 가운데는 높은 파도들이 일어난다고... 남들 사는 것이 모두 태평스러워 보이겠지만 다들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거기예요.


오리가 물 위에 조용히 떠 있는 것 같지요? 하지만 물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질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 쉬운 것은 하나도 없어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상념에 섞여있는 나를 보고 헤정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절에서 또 하루를 보냈다. 당장 어떻게 돼버리고 말 것 같던 나는 그곳에서 이틀이나 살아 있었다. 스님께서 시간 맞춰 신도들과 예불 드릴 시간에도 난 한쪽 방에서 두문불출이었다.


꺼놓았던 핸드폰을 켜보았다. 30개에 가까운 음성 매세지가 와 있었다.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곁에 사는 친구에게도 여럿 와 있었다. 울먹이는 소리로 제발 전화 좀 해 달란다. 불쌍한 애들 어쩔 거냐고...


남편에게도 와 있었다. 들어와서 얘기하잖다.


아빈이에게도 와 있었다. 울면서 엄마만 찾아 됐다.


친정 쪽에서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편에게 연락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한번 쓱 문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여러 번 생각해도 난 울 자격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죽어야겠다는 마음만은 삭으러버렸다. 큰스님 말씀대로 죽을 때 죽더라도 뭐 하나는 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이 너무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만 이틀 만에 변한 남의 심지를 믿을 수 없어서 들어갈 자신도 없었다.


스님께도 더 신세를 지기 싫었다. 죽을 때까지 사회봉사라도 하고 싶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곳에서 남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내 새끼, 내 부모 버린 것이 우습게도 그 쪽으로 필이 꽂혔다.


일타스님의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이란 책도 눈에 들어왔다. 업보에 대한 사례를 보니 내가 겪고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뇌리에 남았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만이 존귀하다... 


그동안 난 내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남인들 사랑 했을까... 난 남편을 흉볼 자격이 없던 거였다.


아이들에게 내 알아서 먹이고 입히고 했다지만 그 또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도리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모든 고통 속에서도 난 내 아이들을 버리고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보대끼며 살아도 곁에서 지켜줬어야 할 엄마란 사람이 아이들을 버리고 나왔으니,,,


3일째 날이 밝았다.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내게 스님께서 자신의 속옷을 내 놓으시며 갈아 입으라셨다. 스님께 뭐라고 말하고 떠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내게 억지로 츄리닝(멀리서 오는 신도들을 생각해서 준비해 놓으셨단다.)을 내미셨다. 그리곤 방을 치우겠다며 밖으로 나가보라고 하셨다. 내가 치우겠다는 말도 마다하시며...


“보살님, 문 밖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쭉 올라가면 낙동강이 나와요. 거기 경치 좋으니까 한 번 가보세요.”


절 밖을 나선 적이 없어서 곁에 강이 있는 줄도 몰랐다. 강물이 있다는 말씀이 왠지 반가웠다. 스님의 말씀대로 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스님, 제 옷 건들지 마세요. 밖에서 잠시 생각 좀 정리하고 올게요. 오늘은 여길 떠날 거예요.”


하고 말씀드렸다.


“알았어요.” 


간단한 스님의 말씀이셨다. 어디로 가시려고 하느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스님의 말씀대로 걸어가니 50M쯤 떨어진 곳에 정말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강줄기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운치가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꼈기에 흐릿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구름사이로 잠시잠깐 해가 비췄고 그 빛줄기가 점점 내 쪽으로 왔다가 잠시 머물렀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3월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봄은 아직도 먼 듯, 땅조차도 얼어 있었다.


그런데 그 땅을 뚫고 새싹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100년은 족히 살았을 아름드리나무들도 눈에 보였다. 차가운 강물 위에 이름 모를 하얀 새가 새끼들을 줄 세우며 헤어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들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광경들을 낯선 곳에 혼자서 보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한낱 미물인 이름 모를 새조차도 제 새끼가 잘 따라오나 헤엄치는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 세월 모진 비, 바람, 눈... 무서운 자연의 이치 앞에서 굳건히 서 있었을 그 나무들은 분명 일제시대, 6.25와 같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 또한 그 자리에 서서 견뎌 냈을 것이다.


작은 씨앗이 언 땅을 헤집고 밖으로 살기 위해 나왔을 때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랐을까...


많은 생각들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닦아도 닦아도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닦는 것을 포기하고 코흘리개 꼬맹이가 되어 울음까지 터트렸다. 신나게(?)게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곳에 아무도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지금 당장은 아이들에게 갈 수 없지만 꼭 데려올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야지. 난 아직 젊잖아.”


사회봉사가 하고 싶은 마음은 잠시 밀어 두기로 했다. 공장을 들어가던 식당에 취직을 하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굳혀졌다.


그 순간까지도 난 남편만큼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절대로 다시 합쳐서 살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만 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벌인 일...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어? 죽지 않고 돌아오네요. 난 오지 않으시길래 강물 속으로 들어가셨나 했지요.”


절로 돌아온 나를 보고 ‘울었어요? 눈이 퉁퉁 부었네요?’하실까봐 걱정했는데 스님은 그 말씀대신 나의 소견머리 작았던 생각을 꼬집어 말씀하셨다.


말씀하시는 스님의 뒤로 나의 옷들이 빨래 줄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 부분은 고드름까지 맺혀 있었다.


“어? 제 옷을 빠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오늘 간다니까. 손빨래 하셨어요? 어휴... 손이 빨개요.”

“내 옷 빠는 김에 함께 빨았어요. 오늘 못가면 내일 가면 되지, 뭐가 급해요.”


그곳을 얼른 벗어나야지만 무슨 일이건 결정이 빠를 것 같았다. 전 날 밤, 스님께선 내게 집으로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의향을 떠보셨다. 난 솔직한 내 심정을 말씀드렸다.


아이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지만 그런 마음으로 금방 들어가 봐야 바로 또 마음이 변할 거라고... 나는 더 많이 고통을 받아야만 정신을 차리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절대로 집에는 안 들어간다고 말씀드린 터였다.


스님께서 내가 있을 곳을 마련해 보겠다고 하셨지만 그것도 싫다고 했다. 내 힘으로 뭐든 해보겠다고... 그땐 여러모로 무식했던 나였다. 그래서 용감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지금은 똑똑해 졌느냐... 그것도 아니다...에휴)


세탁기는커녕 짤순이도 없는 절 빨래 줄에 매달린 나의 옷으로 보아 족히 이틀은 더 있게 생겼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전상 후퇴(?)라고...아니,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가 아닐 수 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하루는 더 묵게 생겼다.


방으로 들어가서 나는 다시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을 펼쳐 보았다. 가기 전에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곁에서 함께 책을 보시던 스님의 핸드폰이 울리고 번호를 확인했다. 그리고 법당으로 나가셔서 나지막이 통화를 하셨다.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빈엄마...”


방으로 들어오신 스님께서 내게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네.”

“아빈 아빠 전화였어요.”

“네? 어떻게 알고요?”

“내가 가방 뒤져서 핸드폰 저장번호를 찾아 봤어요. 허락 없이 한 일이지만 그게 최선일거 같아서요.”

“왜 그러셨어요? 난 그 인간 정말로 보기 싫어요. 지금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요. 나중엔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정말로 싫어요.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스님의 행동이 섭섭했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벌인 일이 화가 날 정도였다. 모든 것이 계획 된 거였다니... 밖으로 나가라고 했던 것과 옷을 벗으라고 했던 것까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기분이 이런거구나...치솟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집 나온 순간부터 애들을 잠시도 떨쳐내지 못하면서 어디서 뭘 하고 살겠어요? 그래요... 또 잘 참고 살았다고 칩시다. 나중에 애들이 엄마 없는 빈자리를 어떻게 채우는지 스스로들 터득했을 때, 엄마가 들어가면 그때 애들이 엄마를 받아 주지 않을 거라 구요. 나를 욕해도 어쩔 수 없지만, 우선은 들어가는 것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차가운 꽃샘추위에 얇디얇은 츄리닝 바람으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궁지에 몰리 쥐의 기분이 이러할까...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절대로... 난 남편과 집에 갈 수 없었다. 아니 없을 줄 알았다.


30분쯤 지났을까...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 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나의 표정은 비장했다. 남편이 가자고 팔을 붙잡으면 물어뜯어 버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엄마~”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3일이란 길지 않은 시간에 아이들의 모습은 그렇게 초췌하게 변해 있을 수가 없었다. 꼬질꼬질한 옷이며 머리까지...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나와 아이들은 또 한바탕 울음바다를 만들었다. 신파의 한 장면처럼... 곧 남편의 까칠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면도도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제법 자라있었다.


“가자.”


남편의 한마디에 난 독하게 마음먹은 것은 어디다 패대기쳤는지 아이들의 연약한 힘에 못 이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언제 쌌는지 물 먹어 잔뜩 무거워진 나의 옷들과 주셨던 책까지 챙겨서 차에 오르는 내게 내미셨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나의 자살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가출을 밥 먹듯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보따리를 쌌던 나다. 갈 때마다 아이들을 꼭 데리고 다니긴 했지만...


홀로 나선 죽음으로의 여행에서 난 분명 느낀바가 컸던 것 같다.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남편과 나와의 관계가 그 일로 인해서 급격히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이 조심하는 듯 했지만 사람의 태생이란 천성. 많지 않은 나이에도 난, 보고 느끼고 격은 것이 꽤 되는 것 같다.


싸우고 보대끼며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모나고 각 졌던 부분이 조금씩은 다듬어지는 것 같다.


스님의 말씀대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루에 22번씩 외우려고 노력한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 역시 난 때때로 남편의 사고가 이해되지 않아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나만 손해 보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나하나 희생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던 마음이, 남편 역시 우리 때문에 희생하는 부분이 있구나, 눈으로 보여 지는 부분도 있다.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다.


나는 나의 부끄러운 삶을 감추고 싶지 않다.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 나하고 똑같이, 아니면 나보다 더 힘든 일을 겪어서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비관할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래서 글을 쓰고 있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내가 분명 크게 될 사람이고 재복도 타고 났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사람이기에, 나약한 인간이기에 내 자신이 잘 컨트롤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다. 그래서 힘들면 가끔씩 스님에게 전화를 드리곤 한다.


몇 해 전, 스님은 강남으로 올라 오셨다. 지하철을 타면 1시간쯤 걸리면 가는 그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스님께 잘 찾아뵙지도 못한다. 내가 전화 하는 것보다 오히려 스님께서 내게 전화를 거시는 편이다.


대놓고 ‘ 제가 살만하면 전화를 드리겠어요? ’하고 솔직한 나의 말에 여전히 웃으시며 ‘ 그래도 잘 참아내고 있어요. 사는게 다들 힘들어요. ’ 하신다.


초하루에 찾아뵙지 않아도 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와도 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등을 다셨단다. 통장으로 삼만원만 보내드린다니 그러지 말라신다. 살림에 보태란다. 하지만 나의 정성을 끝내 감사하게도 받아 주신다.  참으로 감사해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인복만은 타고 난 것 같다. 복중에 최고가 인복이라니...그럼 난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다.


봄이 되면...가을이면...머리에 꽃 꽂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많아져서 힘겹기는 하지만 말이다....


난 나의 모자란 글을 쓰면서 늘 꿈꾸는 것이 있다.

언젠가는... 죽기 전에 꼭 내 이름, 석 자만 대도 생각날 수 있는 책을 펴내고 싶다는 꿈을...


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난 더 이상 나에 대한 지난 과거로 남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하지만 틈틈이 내 눈으로 보는 세상을 계속해서 할 수 있을때까지 올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