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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할머니


BY 김미애 2010-01-15

강진 할머니 / 김미애

 

시장골목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슈퍼를 인수받은 지 만 3년째다.

말이 시장이지 주변에 생겨난 대형마트와 할인매장의 기세에 눌려 여러 업종의 점포며, 노점상들이 오래 전에 하나, 둘 자진 철거해 '시장입구'라는 팻말이 무색하다.

우리 점방에서 골목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다 보면 길 양편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떡집이 있다. 그리고 떡집 앞에다 상추, 시금치, 깻잎 등 몇 가지 푸성귀를 늘어놓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구부정한 자세로 하루 종일 꼼지락거리며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두 분 계시고, 새벽 일찍부터 생선을 손질하고 입 앙다문 바지락을 까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이 허옇게 불은 채 온몸이 생선비린내에 절어있는 생선장수 할머니가 계셔서 '그래도 시장이다'는 느낌을 주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점방이 집에서 걸어다니기에는 좀 먼 거리여서 아침 일찍 남편과 함께 나와서 밤 12시 넘을 때까지, 행동반경이 '점방 안'으로 한정되어 있다.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역시 수시로 빠진 물건들을 체크하여 진열할 것과 오늘 하루 매출은 얼마나 될까, 하는 등 거의 점방과 관련된 것으로 국한된다.

하루 중 만나는 사람들도 유통 관련 직원들 외에 물건을 사러 점방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전부나 다름없어서 그들이 흘리고 간 말이나 행동에서 느낀 점을 간간이 기록하는 것이 전부다.

처음 한동안은 그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내가 이방인이나 다름없이 낯설었을 테고, 손님맞이도 이전의 주인과 비교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점방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친절 유무와 가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사뭇 경계하는 듯했는데, 이제는 이전의 주인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친절도가 더 낫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는 그만큼 단골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방을 찾아오는 고객들 중 이전의 주인과 허물없이 지낸 단골이었다고 하는, 강진이 친정이라는 팔십대의 할머니가 인상이 깊다.

강진은 내 유년의 거의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라 멀리서부터 그 할머니의 귀에 익은 지팡이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오면 고향 할머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다리가 불편하고 몸에 기력이 없어 거의 날마다 지팡이를 짚고 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녀오시는 길에 특별히 살 물건이 없어도 일부러 점방에 들르셔서 "동상은 공판장에 갔는가?"하고 울 낭군의 안부를 묻고 가시기도 했다.

할머니의 손엔 어김없이 인근 약국에서 산 약봉지가 들려 있곤 했다. 병원에 다녀오시는 길이시냐며 인사를 드리면 귀에 보청기를 끼고 계시면서도 잘 안 들리시는지 고개만 끄덕이시거나, 내가 말하는 입 모양을 찬찬히 들여다보시며 답을 주시기도 했지만, 간혹 내가 여쭤보는 말이나 알려드리는 물건 가격을 잘못 알아 들으셔서 동문서답하실 때도 있다.

"나가(내가) 자주 옹께 미안하요야. 그란디 이따 화장지 사야 항께 또 와야 쓰겄당께. 우리 집 앞에도 슈퍼가 시군데(세 군데)나 있는디 이왕이면 고향사람한테 팔아주고자픈께 껌 한 개를 사더라도 꼭 이짝으로(우리 점방) 와서 산당께. 그라고 집 앞에 있는 슈퍼를 지나갈라고 하믄 쪼까 미안한께 그란디 안 보이게 큰 봉다리에다 담아줄랑가?"하셨다. 가까운 가게 놔두고 애써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 우리 점방에 와서 물건을 사 가시려는 인정이 고마웠다

할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는 치아가 거의 다 빠지고 몇 개 안 남아 빠진 치아 사이로 말이 새다보니 발음도 부정확한데다, 유난히 거머누르께하면서 외꽃이 핀 얼굴이 온통 깊게 패인 주름투성였고, 눈이 퀭하게 움푹 들어가서인지 왠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자주 뵙게 되면서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사람의 겉모습만 가지고 전체를 단정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성급한 편견이며 실례인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그 할머니는 오랫동안 당뇨로 고생하며 엉덩이에 손수 인슐린 주사를 놓기도 하셨다고 하는데 몇 해 전, 친구들 계모임에 가셨을 때 일행 중 한 사람이 당뇨에는 커피를 한두 잔씩 마시면 좋다고 권하기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시험 삼아 매 식사 후에 한 잔씩 타서 드셨더니 신기하게도 당 수치가 내려갔다며 지금은 커피를 보약이나 다름없다고 하실 만큼 유난히 즐기셨다.

이제는 인이 박혀서인지 입맛이 통 없어 식사를 거르시더라도 커피가 없으면 못 살겠더라며 하루 세 끼니를 꼬박 커피를 드셔야 기운이 난다고 하실 정도다. 그래서 점방이 비교적 한가한 오전에 할머니가 오시면 잠시 쉬었다 가시라고 의자를 권해 드리고, 좋아하시는 커피를 타 드리면서 할머니가 살아오신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곤 했다.

어느 누구나 살아온 세월을 풀어내려면 노트 한두 권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그 할머니 또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셨다.

열일곱 살에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았고, 스물셋 되던 해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우느라 한 달에 보름 이상씩 집에 안 들어왔는데 바람을 피운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할머니의 표현에 의하면 "한 군데 모아 놓으면 도라꾸(트럭)로 가득 찰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어쩌다 집에 들어와도 폭언과 구박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구타까지 서슴지 않았고, 생활비를 주기는커녕 도리어 당신한테서 돈을 뜯어다가 이 각시 저 각시한테 다 써 버리고, 또 돈을 내놓으라고 발길질을 하기에 절대로 같이 안 살려고 맨발로 집을 나온 적도 있었지만, 두고 온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어쩔 수 없이 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집에 들어간 후로도 아이 셋을 더 낳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생활비 한 푼을 안 갖다 주었고, 이날 평생 할머니 혼자 생계를 꾸려야 했으며, 십 년 넘게 중풍으로 자리보전하고 계시는 시아버지 병수발과 어린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청양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고춧가루 장수와 엿장수만 빼놓고 안 해본 장사가 없으며,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장돌뱅이처럼 장마다 돌아다니며 번 돈으로, 할머니가 낳은 여섯 명의 자식들 외에 남편이 딴 여자들한테 낳아서 집에다 데려다 놓은 다섯 아이들까지 거두어 제 자식처럼 키우며 공부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늙어서 돈도 떨어지고 간암에 걸려 죽을 날을 받아놓으니 찰거머리 같았던 첩들도 다 떨어져 나가 버렸고, 오갈 데가 없어지자 추레한 몰골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늙어서도 그 버릇을 못 버리고 그놈의 눈꾸녘에는 꼭 그런 것만 보인 갑디다. 한 번은 말바우 시장에 갔다 와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뜸스롱 하는 말이 <생선 파는 여자는 몸매가 드럼통 같은디, 과일 파는 여자는 허리가 간들간들하고 다리가 미끈하게 잘 빠졌더라. 한 번 보듬고 뒹굴어 보믄 원이 없겄구마.>고 그라니 월매나 천불나겄어?"하고 말씀하시는 중에도 그때를 떠올리면 새삼 울화가 치미는 듯 했다.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법원에 끌고 가서 이혼을 해 버리고 오백만 원이 든 통장을 주고 시골집에서 따로 살게 했더니, 얼마 못가서 시골집마저 팔아먹고 또 돈 없다고 손을 벌리더라는 것이다.

그 돈을 다 어쨌냐고 했더니, 죽을 때 초상 치뤄 줄 사람이 없을까 봐서 경찰서에다 기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가 다 되어 한 번 와 달라고 사정하기에 아들 얼굴 체면 봐서 남편을 찾아 갔더니 "임자랑 같이 살고 싶다"고 매달리기에 젊었을 적에 엄청 맞고 살았던 걸 생각하니 어찌나 분하던지 무슨 귀신 씨나락 까 묵는 소리 하냐고 실컷 때려 버렸다고 한다.

"영감이 죽기 전에 나한테 뒈지게 맞고 죽었어라."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도 지나온 세월을 회상해 보면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박힌 것처럼 숨이 막힌다고 하셨다.

무책임한 남편에게 의지할 수 없었기에 모든 일을 할머니 혼자 꾸렸어야 했던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미루어 짐작은 해 보지만 그 한 맺힌 세월의 무게는 할머니만이 알 일이다.

 

 

 

*거머누르께하면서 외꽃이 핀 얼굴: 검은빛을 띠면서 누르스름하여 병색이 완연한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