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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을 추억하다(1)-말자 언니네 자취방


BY 김미애 2008-12-23

말자 언니네 자취방 / 김미애

 

자취생활 10년 동안 이사를 다니느라 다섯 번이나 괴나리봇짐을 쌌다 풀었다 이골이 났지만, 이사 갔던 집마다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본 기억이 없다. 

내가 처음 이삿짐을 풀었던 곳은 모 대학 건물 뒤편의 재개발지구인 달동네에서 16만 원짜리 사글세로 살고 있던 말자 언니의 단칸자취방이다.

부모님의 품에서 처음으로 떨어진 타지생활이라 엄마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 혼자 자취하는 것을 영 못 미더워하셨다. 그런데 마침 또랑가에 살고 있는 덕산이네 큰딸인 말자 언니가 같이 자취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시고 그 집 엄마를 찾아가셔서 나를 데리고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원래는 나와 고교 동창이자 같은 대학에 다니는 순영이가 말자언니네 자취방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순영이는 무척 사교적이어서 선배 언니들과도 두루 친했다. 1년 선배이며, 인문반 반장이었던 말자 언니와도 친분이 있기에 함께 자치하자는 말이 오갔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쪽 다리가 불편한 순영이가 말자언니의 자취방이 있는 언덕까지 오르내리기가 어렵고, 학교는 물론 버스 승강장마저 너무 멀다며 친한 친구인 을숙이와 같이 자취를 하게 되어 내 차지가 된 것이다.

나 역시 학교에 가려면 비탈진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그 대학교 교정을 가로질러 20여 분쯤 걸어야 했으며, 교문을 나간 후에도 시내버스로 40여분 가량 걸리는 거리라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게다가 순전히 내 열등감의 발로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학교에 등교하는 무수한 학생들의 시선을 지나쳐서 그들과 반대로 교문을 나서야 했던 건 완전히 쪽팔림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집안 형편상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었으며, 방 얻을 돈을 절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소나마 부모님의 경제적인 부담감을 덜어드릴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여겼다.

또한, 객지에 나와 있는 나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던 엄마 역시 의지할 수 있는 선배 언니와 함께 있어서 한시름 놓으신듯하여 더는 걱정을 끼쳐 드릴 수 없어 학교를 오가며 느끼는 갈등을 나 혼자 추슬러야 했다.

말자언니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먼저 함께 자취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므로 혼자 자유롭게 살았던 때보다 편하지 않을 것은 어느 정도 감수하려는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막상 좁은 방에서 나이가 한 살 아래인데다 눈치껏 알아서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를 데리고 함께 생활하는 데에 애로사항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 집은 내가 이사를 가기 전해의 여름 장마에 허물어진 토담이 그대로 방치된 채로 있었고, 대문도 이미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주인이 살고 있는 본채 건물과 세를 내놓은 딴채와도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문간채였을 듯하다.

집이 언제 재개발되어 헐리게 될지 모른다는 이유라지만, 여기저기 금이 간 토담의 잔해가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방과 딸린 부엌에는 달랑 연탄아궁이만 있어서 설거지나 세면은 물론 걸레 하나를 빨더라도 딴채를 지나 본채를 절반쯤 도는 지점에 위치한 수돗가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수돗가 바로 앞에도 방이 하나 있었다. 거기엔 거동을 못하고 노환으로 누워만 계시는 할머니와 일을 다니느라 거의 집에 없는 아주머니 그리고 아들로 보이는 학생이 살고 있었다.

수돗가 옆에 통통한 대나무로 받쳐 길게 만들어놓은 나일론 빨랫줄에는 할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흰 천 기저귀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내가 수돗가에 물을 뜨러 갈 때면 방문이 열려있던 경우가 많았는데, 아주머니가 일을 가시는 동안 방안에 혼자 누워 있어야 하는 할머니가 답답해하실까 봐 방문을 열어놓고 일을 가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렇게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여 질퍽거리는 천 기저귀를 찬 채로 누워, 고개만 돌려 열린 문틈으로 바깥쪽을 바라보며 아주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일 아무도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이 얼마나 인기척이 그리웠을까,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할머니께 말벗이라도 되어 드릴 걸 그랬다는 짠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 집 방문이 열려 있으면 왠지 무섬증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밝은 낮에는 그런 마음이 조금 덜 했지만 저녁 무렵에는 도저히 수돗가에 갈 엄두가 안 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밤에 수돗가에 가야 했을 땐, 어둠 속에서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퀭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 외면하면서 물을 뜨는 둥 마는 둥 자취방으로 내달렸다.

얼마 안 있어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즐비하게 널려있던 흰 천 기저귀들을 더는 볼 수 없었으며, 여전히 할머니의 슬픈 두 눈이 나를 보고 있거나 푸른 혼불이 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한동안 밤에는 아예 수돗가에 가지 못했다.

집 뒤쪽으로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허름한 막걸리 골목이 있어 항상 시끌벅적했다.

혀가 막걸리에 푹 절어 꼬부라진 고성이 밤새도록 온 골목을 뒤흔드는 것은 예사였다. 더군다나 내가 기거하는 방에는 골목 쪽으로 작은 유리창이 있긴 하였으나 방이 골목보다 낮은 지대이고 대문이 없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시커먼 그림자가 자취방 봉창이나 방문을 두드렸다. 또 때론, 봉창으로 고개를 불쑥 디밀고 들여다보는 짓궂은 학생들 때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밤에는 아예 문밖출입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방문과 창문을 열어 놓을 수 없으니 봉창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말자 언니와 함께 있어 많이 의지가 되어 덜 무서웠던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말자 언니가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결혼을 한다며 폭탄선언을 했을 땐, 결혼 대상자가 나의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어서 더욱 충격이 컸기도 했거니와, 졸지에 그 집에 혼자 있게 되자 마음이 무척 심란하였다.

그 집이 교통이나 주변 여건상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던 건 마음 좋은 말자 언니가 친언니처럼 내게 잘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말자 언니도 없는 그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것이다.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나도 방을 빼고 싶다며 걱정을 끼칠 수도 없었기에 차마 말도 못하고, 정말 막막한 나날들이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방 한쪽 구석에다 호신용으로 빨랫방망이와 긴 손잡이가 달린 망치를 비치해 두고 겨우 잔여 달수를 채웠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왜 그리 미련스럽게 마음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말자 언니와는 두어 달 가량 같이 살았던 게 전부지만 문득문득 말자 언니의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