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에 대한 꼬라지 견해 / 김미애
매 월 마지막 주 토요일 저녁은 부부동반 모임날이다. 내가 결혼했던 해에 결성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어왔으니 올해로 17년 째다.
처음 몇 해 동안은 개개인의 집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알 겸, 좀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우애를 돈독히 하자는 취지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조촐하게 유사를 치렀다.
<어느 집이나 세 끼니 밥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니 평소 먹던 반찬에 수저 젓가락 몇 벌만 더 준비하면 된다.>며 집에서 유사를 치르자고 주동한 사람이 남편이다.
다른 집에서 유사가 있을 때는 입만 달고 가서 먹기만 하면 되지만 막상 우리 차례가 코 앞에 닥치게 되면 대략난감이다. 모두 남편의 집안 형님뻘 되시는 분들이라 '시'자가 들어간 어려운 손님들인데 평소에 우리 식구가 먹던 대로 묵은 김치 한 보시기와 고추장에 멸치 찍어드시라고 아무렇게나 맞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유사 며칠 전부터 손님맞이 집안 대청소도 해야 하고, 무슨 반찬을 만들어야 할지 고심하여 시장을 봐와서 아침, 점심 굶어가며 허리가 끊어지도록 나름으로 부산하게 움직여도 워낙 굼뜬 손놀림이라 다듬어 씻고 손질하는 데에만 한나절 이상 걸린다.
한꺼번에 많은 분량의 밥을 짓는 것도 무리다. 기껏 해놓은 밥이 설익거나 떡밥이 되어 버리기 일쑤여서 자취생활 10년 경력을 무색하게 한다. 음식이 야박스럽게 부족해서도 안 되고, 젓가락이 제 갈 길을 못 찾고 헤매도록 하지 않으려면 그래도 음식다운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20여 명의 음식을 혼자 장만하는 것이 보통 머리 무거운 일이 아니다.
유사를 치르고 나면 남은 음식이야 몇 날 며칠 먹기야 하지만, 예상외의 지출에 가계가 휘청거릴 수 밖에 없어 석 달 가량은 후유증을 앓는다. 그러다 어느 해부턴가 여자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가족적인 분위기도 좋지만 번거롭게 집에서 하지 말고 식당에서 치르자는 의견이 모임 때마다 단골 메뉴로 거론되어 오다가, 지금은 그달 유사에 해당하는 집에서 식당을 정하거나 교외로 나가기도 한다.
가까운 일가 형제들이라고는 해도 나이 차이가 나고, 평소에 왕래나 안부 전화도 거의 없이 지내다가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이라 처음에는 서먹서먹해 하다가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간혹 2차로 노래방에 가자거나, 호프집에 가서 간단히 생맥주 한 잔씩 더 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럴 때는 아무 말없이 그러자고 해놓고 막상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식당 문을 나서면 한두 부부가 볼일이 있다거나, 다른 모임이 중복되어서 가봐야 한다고 꽁무니를 빼는 바람에 2차로 노래방 가자는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자연 무산되어버린다. 그처럼 워낙 싱거운 모임인데도 7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부부를 제외하고 17년 동안 모임이 지속되어 왔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모임 장소를 식당으로 정하니 '뭘 만들어야 할까?'의 고민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주 메뉴가 해물탕 아니면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여 주로 먹어왔던 터라 식상하였다. 우리 유사 차례 때는 뭔가 색다른 메뉴를 찾다가 우리 점방에서 가까운, 신호등 바로 건너편에 있는 '어도'라는 식당의 굴비 정식으로 정했다.
그 식당에서 이따금씩 우리 점방에 물건을 사러 오기도 하였기에 고객관리 차원에서 상부상조하는 의미도 되고, 남편과 교대로 참석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식당에 가니 다들 색다른 메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한 가족도 안 빠지고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 역시 고슬고슬한 밥 한 숟가락 듬뿍 떠서 그 위에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통통한 굴비의 살 한 점을 얹어서 달게 먹을 수 있으리라 잔뜩 부푼 기대감에 얼른 굴비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일착으로 감자를 으깬 사라다와 파전 접시가 서빙되었다. 그 뒤를 이어 김밥과 참치 초밥이 한 사람당 한 점 할당량으로 등장하더니 얼마 후엔 잘게 조각난 해삼과 멍게 그리고 데친 소라가 한 상에 한 접시씩 선을 보였으나 간에 기별도 안 갔다.
또 한참을 기다리니 이번엔 튀긴 누룽지로 만든 탕수육이 놓여졌다. 기름에 튀긴 것이라 느끼하고 딱딱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도록 한꺼번에 갖다주면 좋을 텐데 새 모이만큼 담아서 감질나게 띄엄띄엄 가져다 주니 상에 올려놓기가 바쁘게 빈 접시만 쌓이고, 다른 메뉴가 등장할 때까지는 또 빈 젓가락만 빨고 맨숭맨숭 앉아 있어야 했다.
얼마 후 소꿉 소품이 놓여지듯 담다 만듯한 밑반찬들이 서빙되었고,맨 마지막에 넓은 접시에 누워 등장한 굴비란 놈들은 상 위에 놓여 있는 밑반찬들을 밀치고 중앙을 차지하였다.
한 접시당 네 마리의 굴비가 꼬리 지느러미를 접시 가운데로 모으고 통가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쫙 펼쳐진 채로 있었는데 누리끼리한 기름이 지글지글했다.
'아! 말로만 들어왔던, 자린고비의 전설(?)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굴비라는 것이 이렇게 생겼구나!'하고 앞뒤를 뒤집어 보며 굴비의 자태를 감상해볼 틈도 없이, 서빙하던 아주머니가 상 위에 올려놓기가 바쁘게 "먹기 좋게 해 드릴게요."라고 말하더니 맨손으로 잘게 쭉쭉 찢어놓고 갔다.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굴비가 구리구리한 냄새까지 풍기자 군침이 싹 가셨다.
다들 나처럼 굴비에게 기대를 품었었던 듯, 널브러진 실체에 선뜻 젓가락을 옮기지 못하고 기름기 범벅인 채 부스러진 굴비 잔해를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한 시숙님은 교수로서의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못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시더니, "굴비로 먹자고 누가 예약했었냐?"라고 묻는 의도 속에 실망의 빛이 다분했다.
법원에 근무하시는 시숙님이 "글쎄. **가 시켰는갑네."라고 말씀하시는 어투에서 역시 점잖은 체면에 뭐라 싫은 내색을 못하고 동조를 했다. 이제까지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의견이 나오든 언제나 수수방관하는 분이셨다. 그러자 오지랖 넓은 방앗간 시숙님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벌겋게 변하더니 기어이 한 마디 하셨다.
"이것이 주 메뉴여? 이거 나오고 인자 아무 것도 안 나오는 거여?"라고 하시더니 찢어져 쌓여 있는 굴비더미를 불씨가 꺼진 아궁이 헤집듯 젓가락 끝으로 들쑤셨다.
"이것이 뭣이여? 냄새가 쓰겄다고? 곤내가 팍 나서 어디 묵겄다고?"
부지깽이처럼 방앗간 시숙님의 손에 들려있던 젓가락이 상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워낙 앉을 자리 설 자리를 구분 못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불쑥 내뱉곤 하셔서 때론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 것인가?'에는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자진해서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면도 없지 않다.
"그랑께 말이여. 냄새가 좀 안 좋긴 하그마. 그래도 굴비인디 맛이 있겄제. 우리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굴비를 묵어 보겄는가? 한 번 묵어 보드라고."하고 여전히 중립을 지키는 법원 시숙이 좌중을 독려하며 젓가락 들기를 권했다.
아무리 봐도 영광 앞 바닷물에서 놀던 놈이 아니고, 먼 바다에서 해찰 부리다 잡혀온 놈 마냥 단단한 비늘이 붙어있다 떨어진 흔적이 역력한 뻣뻣한 살갗이 기름에 오랫동안 튀겨지다 못해 바싹 굳어 있었다.
서빙하던 아주머니가 찢어놓고 간 살점이 한 입에 집어 먹기엔 좀 많은 것 같아 젓가락으로 조각내어 먹으려 했는데, 워낙 질겨서 손으로 잡고 물어뜯어 한입 베어 문 순간, 또 한 번 기겁했다.
햇볕에 바싹 말려진 북어만큼 질긴데다, 얼마나 소금물에 절여놓았던 것인지 짜다 못해 완전히 소태를 씹는 듯 했다.
한 사람 앞에 한 마리 꼴이니 책임지고 한 마리를 씹어 먹는다면 질긴 건 둘째치고, 입 안과 혀 그리고 뱃속이 강국(소금물)에 염장될 판이었다.
평소에 음식을 만들 때 간이 안 맞아도 맛이 없다는 말을 안 할 테니 반찬이며 국을 싱겁게 만들라고 하였던 남편은 혈압 때문에 염분을 주의해야 하는데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놓여지게 된 셈이다.
이렇다 할 음식을 만들어 내놓지 못하는 주제에 식당 음식이 맵네, 짜네 거론할 입장은 못 된다. 하지만 그 '어도'라는 식당은 몇 해 전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막내시누네와 가족 외식을 했을 때 비싼 돈 주고 허기가 졌던 속 쓰린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시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회를 사드리려고 식당을 찾던 중 '축 개업'이라는 리본을 두른 화환이며 화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출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개업집이니 음식이 잘 나올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그 식당에 들어갔었는데 떡 한 접시 더 나온 것 외에 몇 차례에 걸쳐 음식 한 가지씩 나르는 서빙이 너무 두서가 없었었다.
튀긴 새우가 설 익기도 하였고, 주메뉴가 너무 허망해서 얼마나 돈이 아까웠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장사해서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본다고 툴툴거렸겠는가?
나는 잘 하지도 못하면서 주제도 모르고 식당 음식을 탓하기는 그렇지만 정말로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이 맞다.
예전에는 꿀꿀이 죽도 없어서 못 먹었지만 이제는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물어 물어 찾아 다니는 추세다.
소문만 그런 건지, 실제로 맛이 있어서 손님이 북적거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줄을 서서 오랜 시간을 끈기있게 기다렸다가 막상 먹어 보면 그 맛이 그 맛인 것 같은 실망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보편적인 가격이라면 이런 집도 있고, 저런 집도 있다치고 말 텐데 터무니없는 금액을 지불하게 되는 경우엔 내 돈 쓰고 우롱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그리고 맛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필요가 있는데, 체면 때문에 다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주 맛있네요!"를 인사치레로 해주니, 자기네 음식이 손님한테 만족스럽게 한 걸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수도 있다.
점방 때문에 남편과 교대로 식사를 해야 해서 싱거운 된장국에 밥을 말아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나왔는데 비싼 밥 먹고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다.
자연히 입이 네댓 자나 나와 점방에 들어서니, "어째 맛이 없었는가?"라고 남편이 물었다.
뭔 굴비가 그렇게 질기고 소태 씹는 맛이냐고 구시렁거렸더니, 오히려 나더러 모르는 소리한다면서 조기나 병치처럼 구워서 내놓으면 젓가락으로 집어지지도 않고 흐물흐물 쏟아지거나 부스러지는 것이 고기냐며, 음식 맛도 모르고 먹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음식 타박을 한다고 일축했다.
방앗간 하시는 시숙님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라 다른 음식점에 가도 불평을 안 할 때가 있느냐며, 쥐뿔도 없는 사람이 음식을 평한다고 되려 열을 내더니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을 기대하느냐며 내가 만든 음식에 대한 서운함마저 쏟아냈다.
원래 굴비가 그런 것이라며 젓가락이 닿자마자 부스러진 게 고기이냐는데, 남편의 입맛이 소태 씹은 것 마냥 짜면서 '씹을수록 게미가 난다'는 그 질긴 고래심줄 씹는 맛이라면, 난 도저히 그 입맛을 맞출 수 없음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내가 먹은 굴비에 대한 느낌에 불편한 감정까지 실을 필요는 없었지만, 노릇노릇 구워진 통통한 살점을 뜯어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컸던 만큼 실망감 또한 많이 컸던 탓에 벤댕이 성질이 발동했던 것이 남편의 논리에 깨죽이 된 셈이다.
남들이 아무리 발가벗은 임금님의 우세에 입에 발린 칭찬를 남발하여도 콩 꺼풀을 벗겨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고, 천장에 매달아 놓은 굴비를 마냥 바라만 보아도 밥이 술술 넘어갔을 거란 환상이 무너졌다.
그런 게 굴비라면, 난 차라리 젓가락으로 집었을 때 보들보들한 하얀 속살이 잡히는 조기를 택하거나 하다못해 황시리(조기새끼)를 구워 머리까지 쪽쪽 빨아먹는 편을 택할 것이고, 삼겹살을 구워 먹더라도 배 터지지 않을 만큼 실컷 먹고 이빨 쑤시면 장땡인 것이다.
굴비가 뭔지도 모르는 무식이 탄로난 경우이니 얘기를 풀면 풀수록 내 얼굴에 먹칠을 자청한 꼴이고, 결국엔 그런 반찬은커녕 그 십 분의 일 아니 백 분의 일이라도 만들어 줘봤느냐거나, 만들 수 있느냐는 핀잔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비싼 돈 주고도 배가 채워지지 않고 허기가 진다면 그 또한 뭔가 2 % 부족한 탓이다.
어찌됐든 스스로 생각해도 난 너무 단세포적인 경향이 있는데다, 부정적인 꼬라지를 여전히 드러내놓고 말았다는 데에 부끄러울 따름이며, 음식을 먹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음식 타박한다는 말을 들었긴 하지만, 여럿이 먹을 땐 다수의 식성에 어느 정도 무난할 만한 음식을 시켜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