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도 쓰린 가난을 등에 업고 살아오던 어린 시절.. 내겐 얼른 어른이 되서 하고픈 일
이 세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맘 편히 갈 수 있는 화장실을 갖는 것이고..
다음 하나는 누가 보아도 멋진 옷을 입는 것이었으며..
그 나머지 하나는.. 누가 보아도 멋진 .. 그런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이 철없었던 바램을 하나 하나 어리석음으로 느끼기까지 내겐 수없이 많은 좌절과 무너짐과
서러움이 늘 함께였었다.
내 어릴적 첫번째 바램은 우리가 세 들어 살던 같은 반 곰보 녀석의 비아냥거림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될때까지도 반듯한 내 방 하나 없었던 내게 우리가 세 들어 살던 그 집의
주인집 아들은 매월 25일이 되면 같은 반 친구들에게 늘 자랑삼아 떠들곤 했다.
"오늘 우리 집 달세 받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 오늘 고기 먹기로 했지. 크크크"
좁은 동네에서 누구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만큼 왕래가 잦았던 우리 동네 친구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어쩌면 그리도 철이 없었던지.. 내가 받을 상처 만큼은 아랑곳 않은 채 외려..
한 마디씩 거들곤 했다.
" 야~ 너네 아빠 아직도 노냐? 너네 방세 아직두 다섯 달이나 밀렸다며~? ㅎㅎㅎ"
" 너 오늘 곰보가 책가방 않들어 주면 엄마한테 말해서 너네 내쫒는다는데~ 하하하"
이런 말들이 오갈 때마다 난 그저 책상에 엎드린 채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곰보와 삼총사 녀석들...그래도 난 아무
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멋 모르고 처음 그 녀석들의 만행을 선생님께 일러 주었다가 종례
시간에 잔뜩 혼이 난 곰보녀석이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졸라서 우리가 쓰는 화장실 앞에 커
다란 개를 묶어 놓았기때문이다.. 원래 셋집의 화장실은 주인집의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함
께 써야 했기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마다 엄마를 데리고 화장실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목줄이 길게 늘어져.. 이름만 다정한, 복실이라는 그 난폭한 녀석이.. 간혹 잠을 자거나 할 때
가 아니면 난 어김없이 부글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다시 엄마에게로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
다.
그 쓰라린 기억때문인지 아직도 나는 작은 강아지 마저도 무서워하고 늘상 변비에 시달린다.
그 두번째 바램은 어린 마음에 내가 몰래 짝사랑하던 영우라는 녀석의 여동생 때문이었다.
반에서 키도 제일 크고 공부도 무지 잘 했던 영우는 피아노를 무지 잘 치던 아이였다.
그당시 학원이라는 곳을 다녀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내게 태권도 학원, 주산학원을 다니면
서도 피아노를 아주 멋드러지게 치던 영우는 어린시절 나의 왕자님이었다.
동화에서 보면 언제나 멋지고 잘생긴 왕자님은 맘씨 까지도 착해서~ 나의 왕자 영우는 내게
도 늘 친절했었다. 그 시절 그 귀하다는 바나나를 딱 2개만 학교에 가지고 와서도 선뜻 내게
하나를 건내주었던 녀석이었으니까.. 그 때마다 난 왕자님의 어진 마음에 무척이나 감동했
고 그날 저녁 집에 가서는 철없이 엄마에게 바나나를 사달라며 조르곤 했었다. 그럴때면 엄
마는 늘 농약이 많은 바나나는 많이 먹으면 큰 병에 걸린다고 하셨고.. 난 속으로 살며시 걱
정이 되면서도 매일 같이 바나나를 먹는 것만 같았던 영우네 식구들이 늘 멀쩡한걸 보면 틀
림없이 울 엄마가 돈이 없어서 또 거짓말을 친다고 생각하며 화장실 달력 한 장을 뜯어 그 뒷
면에 '엄마는 거짓말 쟁이, 우리집은 똥거지야' 라는 글을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히 채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의 왕자님이 그의 궁궐에서 생일파티를 한다며 내게 초대장을 전해주었다.
나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초대장을 받은 다음날
영우의 동생이 우리 반을 찾아와서 나를 불렀다.
"저기 언니! 우리는 호주에서 살다 와서 울 오빠 생일파티때 다들 드레스를 입구와야하는데..
언니는 그런 거 없지?"
하며 내 모습을 위 아래도 훑어보았다.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우리 왕자님의 공
주 동생은 같이 온 시녀들과 함께 귓속말을 하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어린 녀석의 그 당돌한 말과 행동이 어쩌면 그리도 당당하던지.. 그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난 철썩같이 믿고는 어린 후배들 앞에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그 일이 있은 후로 내
맘 속에서 나의 왕자님도, 바나나의 그 달콤하고 향긋한 기억도 저 멀리 동화책 속으로 사
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 촌스럽게도 바나나 알러지가 있다.
철없고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 내가 소원하던 마지막 바램은 세련되고 멋진 엄마를 갖는
것이었다. 한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농수산물 시장에서 사람들이 버리고간 배추의 겉잎을 주
어 모아 김치를 담아먹는.. 남이 방치해 놓은 공터에 텃밭을 일구어 옥수수며 상추를 심고 우
리에게서 받아 채워놓은 냄새나는 요강을 들고 십분 거리의 그 곳까지 가서는 억척스럽게도
부어대던 그런 엄마말고, 외할머니가 사다 주신 엄마의 블라우스를 옆집에 사는 미숙이 엄마
에게 팔아 그 돈으로 산 돼지고기 두어 근을 1년 먹을 분량으로 나누어 냉동실에 넣으면서
뿌듯하게 웃던 그런 엄마 말고.. 난 정말 세련되고 멋진 엄마를 갖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었던 엄마의 모습은..
차라리 학교에나 오지 말지~ 매 학년이 시작 될 때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이모 옷을 빌려
입고는, 헐떡거리는 뾰족 구두에 뒤뚱뒤뚱 몸을 맡기고 커다란 운동장을 길게 가로질러 걸
어 오는 엄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스승의 날에 맞추어 멋지고
이쁜 모습으로 선물이 들어 있는 듯한 쇼핑백을 들고 오는 것도 아니고, 늘 촌지하나 없어
초라하게.. 선생님 책상 한쪽 서랍 속에 버리듯이 던져져 있을 것만 같은 편지 한통만 달랑
들고는 너무나도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오던 가난한 엄마의 모습...
이렇게 나의 어리석고 못된 유년시절은 그 당시 내게는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언제나 내겐 하루 빨리 이 집을, 이 동네를, 그리고 우리 엄마를 벗어 나야한다는 생각뿐이었
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바램은 늘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의 바램대로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나만의 공간에서 내 식구들과
함께 맘껏 행복해야만 하는 지금.. 나에게는 또다시 세 가지의 바램이 생겼다.
그 하나는 그 끔찍한 줄만 알았던 그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고..
그 다음 하나는 우리 엄마가 아주 아주 오래도록 내 곁에 살아 있어 주는 것이고..
그 마지막 하나는.. 내 어린시절 그 철없음으로, 우리 엄마가 받았을 상처를 씻은 듯이 다
잊게 해드리는 것이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라고 엄마는 한 번씩 웃으면서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하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안쓰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재를 돌리곤 한다.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새긴다.
"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우리 엄마! 엄마의 그 모습.. 이제는 조금씩 저도 닮아가고 있어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느 엄마가 더 한 일을 못하겠어요."
그리고...
바나나가 귀하던 그 시절, 그 철없고 어리석던 가난한 아이가
세월이 흘러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어릴 적 내 엄마가 하던 그대로..
난 새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늘 아이들의 선생님께 촌지없는.. 짧은 편지를 쓴다.
"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 따로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이를 오늘부터 선생님께
드립니다. 오늘부터 이 부족한 아이를 선생님의 자식으로 생각해주세요..."
사랑하는 엄마!
당신은 제 인생의 가장 멋진 선생님이자.. 나의 영원한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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