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년10월 24일이었어요. 제가 사는 제주시 용담1동에 동민단합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 날 우리가족은 한라산 등반을 계획했던 날이었지요. 헌데 자칭 우리 집 호주이며 위대한 남편이 지난주부터 하루걸러, 혹은 연속으로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하여 새벽 2시나 5시에 퇴근을 하는 겁니다.
혹 제 얘기를 듣는 분들께서 "그렇게 부지런하고 고단하게 일하는 사람도 있구나 참 불쌍하다" 고 여기실 분들이 계실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지요.
이 사람은 아침에 나간 그 멀쩡한 정신과 모습으로 다시 고스란히 퇴근 하는 것이 아니라 술에 흠뻑젖어, 그냥 손가락을 갖다 대기만 해도 술이 줄줄 흐를것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살다보면 남자들 그럴때가 있을 테지만 그 즈음은 너무 도가 지나치다 싶었거든요.
이만 하면 어떤 상태인지 다들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며칠 제 속을 끓이는 지라 전 아예 이틀 동안 입을 닫고 지냈지요.
그리고 일요일 아침이 돌아왔습니다.
10월 초부터 아이들 데리고 한라산 단풍 구경을 가자고 한 약속은 용케 기억하고 있었는지 9시가 훨씬 지난 시각에야 베개에서 부스스 한 머리를 겨우 들더니 이상야릇한 냄새(마늘과 음식상한 냄새 등이 고루 섞인 이상한 악취)를 풍기며 그러더군요.
"오늘 한라산 갈 거야?"
전 대답도 하기 싫어 한번 눈을 흘긴 뒤 그냥 부엌으로 들어가 식사준비를 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한라산 등반을 위해 사다놓은 초밥재료며 과일 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 속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까지 "엄마 오늘 한라산 안 갈 꺼?" 혹은 "아이 짱나 오늘 같은 날 집에 있어야 한다니." 라며 슬슬 제 곁을 맴돌곤 했습니다.
그 때였지요. 동민 체육대회를 알리며 참석을 요하는 가두방송이 울려 퍼진 것이.
그래 밥 먹고 한천초등학교 운동장에나 가서 실컷 응원도 하고 뛰어다녀나 보자. 하는 생각으로 서둘러 밥상을 차려 아이들에게 먹이고 집을 나섰습니다.
말이 동민 단합체육대회지 실상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니 거의 노인체육대회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단독주택이 거의 차지하는 동네라서인지 나이든 노인 분들이 많이 나와 있었거든요..
그래도 간간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 구석구석에 모여 앉은 젊은 엄마들도 보였습니다.
어쨌든 그 틈에 섞여 먼지바람 이는 운동장을 바라다보며 박수도 치고 웃음도 날리며 오전 오후시간을 잘 보냈어요.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던 경품추첨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그 경품권을 타기위해 딸딸딸이 엄마로 불리는 저는 세 딸들을 불러 모았지요. 아무래도 이러한 경품추첨방식은 가족이 많을수록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말입니다.
옹기종기 모여 든 딸아이들을 향해 저는 일장 연설을 하듯 "저기 구령대 옆에 예쁜 리본을 묶고 줄지어 선 자전거들이 보이지? 우리 오늘 저 열 댓 개 넘는 자전거 중에 한대만 타고가자." 며 말했습니다.
엄마의 말을 들은 우리 집 딸들은 그때부터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더군요. 마치 써클렌즈를 낀 반짝이는 연예인 눈빛처럼.
중1 큰딸은 벌써 옆집 사는 친구와 저만큼 앞서서 경품권과 동민체육대화기념 수건을 받아들고 맨 앞줄에 퍼질러 앉아 있었고, 저는 둘째와 셋째를 데리고 아직도 줄을 서서 차례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어르신네만 그렇게 민첩한 건지 도 전체 어르신네들이 다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차례를 기다려 경품권과 기념 수건을 받아드는 제 손을 밀쳐내며 먼저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눠주던 청년회소속 사람도 어이가 없었는지 “남의 것 먼저 뺏어 간다고 당첨될 확률이 높은 건 아닙니다.”며 웃더군요.
그렇게 대여섯 사람에게 저와 딸아이들 몫을 뺏긴 뒤 겨우 경품권을 받아들고 추첨 석 앞으로 가 앉았지요.
그런데 그렇게 고대했던 자전거 추첨은 마지막 한대까지 다 끝나도 우리 몫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동네 가구점에서 기증해준 책장이며 의자, 혹은 씨디 꽂이도 다 추첨되어 없어지고 심지어 이불 집에서 날라져 온 등받이며 이불까지 다 빠져 나가도 우리 네 식구의 경품권 번호는 불려 지지 않았습니다.
여덟 살 막내가 입술이 삐죽 나오며 눈물을 글썽 거리더군요.
그러자 곁에 앉아있던 큰딸아이 친구 엄마가 그러더군요."걱정 마! 이제 마지막으로 저기 있는 저 큰 세탁기 보이지? 저거 타고가면 돼!"라고 하며 웃어주더군요.
그때 전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답니다.
(에고 세탁기는 못 타도 저 흔하디흔한 탁상시계를 뽑을 때만이라도 추첨이 되었더라면 우리 막내 미소라도 지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차에 청년회장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내 경품권에 적힌 번호를 외치는 것이었어요.
저는 억대 복권이나 당첨된 것처럼 순간 정신이 나간느낌으로 몇초동안 입을 벌린채 눈을 크게 뜨며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여전히 그 청년회장의 머리에 올려 져 있는 모자 빛깔은 하얀색이었고, 모래바람이 이는 제주시 용담동 한천초등학교 운동장 가운데였답니다.
다시한번 하얀색 모자밑에 놓여있던 청년회장의 얼굴 아랫쪽 입술에서 외치는 숫자는 164번 제 경품권 번호였습니다.
그제 서야 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세탁기 포장박스를 어루만지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지요.
언제 왔는지 세 딸 모두 엄마 곁에 서 있었고, 앞니 두개가 휑하니 비어있는 막내의 입을 쳐다보면서 전 말할 없는 기쁨에 들떠 딸들을 껴 안았습니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경품도 다타보는구나. 가만있자 어제 내가 무슨 꿈을 꾸었더라?
저는 그렇게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마냥 웃고 서 있었지요. 그 무거운 세탁기를 어떻게 운반하여 집에 가져갈까? 에 대한 고민은 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사실 두어 번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 집이 있었고 지난밤 술 마시고 돌아와 내내 자고 있는 남편이 있는데 옮기는 거야 무슨 대수냐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헌데 집으로 뛰어갔던 큰달이 달려와 "엄마! 아빠 집에 없어요."라고 하데요.
그제 서야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해보니 남들 다 쉬는 그 휴일에 사무실에 가서 못 다한 일을 처리하는 중이라더군요.
여태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던 사람이 왜 하필 그날따라 착하게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할까?
말문이 막혀 가만히 서 있는 저를 딱하게 보셨는지 또 한 번 그 청년회장님이 인심을 쓰시더군요.
회원의 차를 부르더니 "이 아주머니 집이 요 앞인 모양인데 좀 가져다주고 오라"며.
그렇게 세탁기는 우여곡절 끝에 우리 집 현관까지 도착했습니다.
가져다주시는 분들이(세 명의 청년회원)"경품을 집에까지 배달해 주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며 골목 끝 가파른 이층 층계까지 올려다 주고 웃으며 돌아가더군요. 너무 고맙고 미안해 쩔쩔맸습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며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어이구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니네 아빠가 꼭 그 경우다."
그 말을 듣고 막내가 그러더군요.
"아빠가 개똥?"
그제 서야 전 화들짝 놀라며 말했습니다."아니! 세상에 가장 쓸모없는 것이 개똥 이라는 거야."
말 해 놓고 보니 또 애들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에 비유했더군요.
하여간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 자꾸 꼬이는 어수선한 하루였고, 약에 쓰려고 놔둔 비장의 재료(?)가 개똥이 된 날 이었습니다.
03년 10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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