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667

단편소설-손톱2


BY 달맞이꽃 2007-11-12

‘결국 가지고 논 거였어. 가져 버린 여자는 흥미가 없다는 건가? 나쁜 자식.......’

윤영에게 그것은 첫 경험이었다. 살을 베이는 듯한 고통을 세훈을 향한 마음 하나로 참았는데 그녀의 처녀성을 가져 버린 세훈은 그대로 그녀에게 안녕을 고했다. 모텔 방을 나가는 세훈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면서 윤영은 무슨 일이 일어 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을 때까지만 해도 평소의 세훈이었다. 다를 것은 전혀 없었다. 다정했고 뜨거웠으며 장난기어린 평소의 웃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정신을 차린 윤영은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눈물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의 영 번을 다급하게 눌렀다. 꺼져 있다. 윤영은 갑자기 절망감이 몰려왔다. 슬픔보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온 몸이 쥐어짜지는 듯이 아팠지만 머릿속은 멍하니 아무 감각이 없었다. 반 시간여가 흐른 뒤에야 윤영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모텔 방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냉기 어린 깜깜한 집 안으로 들어선 후 윤영은 한참을 불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신발을 벗을 기력도 없었다. 사람이 지날 때면 자동으로 인지하여 불이 켜지는 현관의 등이 켜졌다가 꺼질 때까지 윤영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고도 현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장실의 문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에 익을 때까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조금씩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사물을 감지하게 되자 마음의 슬픔도 함께 감지하게 된 것인지 갑자기 윤영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윤영은 무엇이든 위로가 될 것이 필요했다. 아니, 화풀이 대상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핸드백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씻기 위해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분노와 슬픔이 군데군데 묻어 있어 어둡고 볼품이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기억들을 몇 번을 되감기를 하여 찬찬히 훑어보아도 단서는 잡히지 않았다. 얼굴을 감싸 쥔 그녀의 손톱이 오늘은 유난히 더 아름답다. 세훈이 좋아하던 손톱이었다. 언제나 관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손톱이었다. 세훈을 만난 뒤로, 정확히 말해서는 세훈이 윤영의 손톱을 아름답다 말한 이후로 윤영은 한 번도 손톱을 자르지 않았다. 그저 정성들여 다듬고 기다란 손톱이 다치지 않을까 늘 조심할 뿐이었다. 샾을 운영하기 위해서도 아티스트의 손톱은 아름다워야 했다. 들르는 손님들은 수많은 아트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우면 으레 윤영의 손톱처럼 해 달라고 했다. 그러한 손님이 여럿 되는 날은 세훈과 데이트하러 나가는 걸음이 자신이 있고 더 설레임이 넘치는 것이었다. 윤영에게 있어 손톱이란 마치 세훈과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잘라버리리라. 기다란 손톱은 사실 이것저것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사실 그냥 칩을 붙여 손톱 길이를 늘려도 되었다. 하지만 윤영은 왠지 그것이 세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 소개팅 자리에서 마지못해 끌려나온 것처럼 어정쩡하게 있던 세훈이 윤영의 손톱을 보고서는 눈을 빛냈었다. 미대 출신이어서 작은 손톱에 그린 그림이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나보다. 세훈과 달리 윤영은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하며 늘씬한 몸매하며 어째서 여자 친구가 없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런 남자였다.

그렇게 처음부터 윤영이 심적으로 지고 들어간 인연이긴 했지만 그래도 세훈의 마음도 점점 깊어가고 있으리라 그리 짐작했는데 그녀의 짐작이 틀린 것이었나. 지나간 과거는 이미 끝이 났다. 손톱을 다듬는 마음처럼 소중히 지켜온 과거에 대한 미련을 윤영은 분노가 부추기는 힘에 의지해 싹둑 잘라 버렸다.

‘다른 여자들은 실연을 하면 머리카락을 자른다지? 훗, 이것도 직업병인가?’

손톱을 자르면서 윤영은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잘려진 손톱은 다시 자랄 것이다. 머리카락을 뭉턱 자른 것보다 다시 회복하는데도 훨씬 적은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딱 그 시간만큼만 아파하리라. 그 정도도 아파하지 않으면 그동안 세훈에게 준 윤영의 마음이 너무 아까웠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