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522

내 친구 충일이


BY 둘리나라 2007-09-11

 

                             제목: 내 친구 충일이


  봄볕이 따스한 오후는 나른한 잠의 세계로 손짓을 했다. 이상하게 하느님은 봄에게 특별한 약을 주셨는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하품이 연달아 턱이 아플 정도로 나온다. 고문도 이런 지독한 고문은 없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꼬박꼬박 졸고 있는데 경기를 한 전화기가 발악을 하며 울어댔다. 깜짝 놀라 뛰어가 받았더니 친구 충일이의 목소리였다.

 반가움에 그동안의 소식도 전하고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자잘한 안부도 주고받고, 친구들의 근황과 부모님 건강까지 챙기다 보니 수다 아닌 수다가 되어 버렸다. 오랜만에 하는 전화여서 더욱 말이 길어지고 웃음도 늘어났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수화기를 놓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고마운 친구이다.

 충일이 와는 초등학교 동창이고,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남자 친구이다. 어릴 때는 그리 친하지 않았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치고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 ‘초등학교 반창 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우리는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생각하는 것도, 관심을 가지는 분야도 비슷해 금방 가까워졌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어색하고 부끄러운 감정은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봄 눈 녹듯 사라졌었다.

 함께 나누는 커피 한 잔에 하루를 이야기하며 웃고, 둘이서 기울이는 소주 한 잔에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고 상의하며 고민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성간의 야릇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보다는 끈끈하고 질긴 우정이 더욱 깊게 서로를 이어 주었다. 편한 만남이 좋았고,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니 눈치 보며 실수할까 걱정하며 조심스러워 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통설을 깨고, 만나면 어깨부터 두드리며 안아줄 수 있는 사귐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서로의 삶 속에 끼어들지 않으면서 서로 이해하고 아껴줄 수 있음이 우정의 정의라면, 나와 충일이는 제대로 된 우정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충일이는 군대를 갔고, 나는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집안의 반대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가슴 속에 치유할 수 없는 불효의 상처를 남기고 사랑을 좇아 부모님께 등을 돌리는 엄청난 일을 벌이고 말았다.

 단칸 사글셋방에서 시작한 신혼 생활. 유리창도 없고 부엌문도 없는 작은 방에서 이불 한 채와 숟가락 두개로 어린 신부가 된 나는 사랑 하나만을 믿고 의지했었다. 그러나 가끔씩 고개를 드는 그리움에 코끝이 아프도록 밤하늘을 보며 운적도 많았다. 말 못할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사랑과는 별개의 감정으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 같았다. 가족들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보고픔은 도수가 높은 술처럼 나를 취하게 했다.

 엄마가 보고 싶고, 친구들이 떠오르고, 고향의 냄새가 맡고 싶을 때면 밤하늘을 보며 별을 세었다. 수백, 수천 개의 숫자를 세어도 사라지지 않는 남겨진 슬픔이 목을 아프게 하고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날이면, 이상하게도 충일이는 사람 냄새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방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나, 오늘 휴가 나왔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다.”

  술 한 잔에 깊어 가는 밤. 감추어 두었던 밀린 이야기를 속이 후련하게 하고 새벽이 오면, 충일이는 건강 하라는 말을 남기고 손을 흔들며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보내고 돌아 간 자리에는 항상 짧은 몇 마디의 글과 함께 하얀 봉투가 새벽빛을 받은 고무신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수정아, 힘내. 너는 강한 사람이니까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친구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벅차올라 뒷모습이 안 보일 때 까지 멀어져 간 길을 바라보다 울컥 눈물이 나서 눈앞이 흐려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랬다. 나에게 충일이는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오래전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인연의 나무처럼 우정이라는 양분을 먹고 잎과 열매를 맺은, 한 뿌리에서 자라난 열매였는지도 모른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친구와 식당을 동업하게 되었는데, 돈이 약간 모자랐다. 그러자 어학연수 간다고 적금 들었던, 며칠만 있으면 큰 이자가 붙어서 목돈이 되는 돈을 선뜻 해약하고 비를 맞으며 가져온 친구는 활짝 웃으며 얘기했다. 이게 진짜 필요한 사람은 너라고, 돈 많이 벌면 갚으라고…….

 그게 얼마나 어렵게 마련한 돈인 줄 알기에 가슴에서 비가 내렸다. 대학 다니면서 방학 때마다 막노동을 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었기에 정말 그건 돈이 아니라 피와 땀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고생만 해 온 자신의 생활을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내 친구. 누구보다 세상을 밝게 보고 열심히 살고 있는 친구가 곁에 있기에 난 세상 누구보다 부자였다. 그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적어도 난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아직 많은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내 곁에 이런 친구가 함께 숨을 쉬고 같은 하늘을 보며 앞으로의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우리는 보통 우정을 지란지교나 관포지교로 이야기한다. 난처럼 은은한 향기의 사귐도 좋지만, 관중과 포숙의 사귐처럼 세상에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라고 했던가.

나는 감히 말한다. 세상에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사람은 충일이라고. 나를 기쁘게 하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충일이 같은 벗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저녁노을이 온 세상을 삼키고 있다. 붉게 물드는 가슴으로 이제 곧 밤이 찾아 들 것이다. 하루만 해도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시간은 요술을 부리는데, 하물며 세월의 변화는 얼마나 조화가 심할까.

한결같은 마음으로 뒤에서 응원을 보내는 소중한 사람이 있기에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란 인생을 살아가는 재산이며 가장 순수하게 만날 수 있는, 꾸미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는 가슴이 아닐까. 나는 오늘 전화선을 타고 온 벗의 목소리를 모아 삶의 창고 가득 우정이라는 재산을 쌓아 두었다. 아무리 쌓아 두어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