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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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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그늘 아래서


BY 둘리나라 2007-09-11

 

                       제목: 나무그늘 아래에서


 내가 살고 있는 울산에는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펴고 바닷바람을 반갑게 맞는 멋진 곳이 있다.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연인 또는 친구라는 명찰을 달고 더위를 피해 찾아와 눈으로는 질리도록 파란 바다를 보기도 하고, 가슴에는 솔바람의 여유를 느끼는 명소이다. 봄, 가을, 겨울에는 그 나름대로의 운치에 젖어 추억을 남기는 그곳이 바로 방어진 해수욕장에 있는 ‘송림’이다.

 여름에 들어서기 전에 한번 다녀오고 싶어 시간을 내 아이들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여름의 끈적임이 묻어 있는걸 보니 봄이 지나가고 있나 보다. 방어진에 내리니 공기 속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콧속으로 달려와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좋아하는 아이들을 앞세워 모래사장을 걷고, 조개도 줍고, 밀려오는 파도와 장난도 치며 한참을 보내다가 소나무 숲으로 향했다. 백사장을 따라 걷다가 산으로 난 계단 앞에 섰다.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에 첫발을 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언제나 계단의 끝에 가서는 숨이 턱에 차올라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운동부족형 30대 아줌마의 전형적인 모습을 오늘은 기필코 안 보이리라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는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어쩌랴. 결심은 앞을 서고 다리는 천근만근이 되어 억지로 할 수 없이 따라오는 형상이 되는 데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산골짝의 다람쥐처럼 뛰어서 올라가 꼭대기에서 엄마를 부르는데, 절반을 올라간 나는 그로기 상태가 되어 등으로 흐르는 땀을 친구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동무로 삼고 이를 악물고 올라가야만 했다. 왜 이리 힘들게 계단을 오르느냐고 묻는다면 정상에서 보게 되는 바다와 바람과 하늘이 너무 좋아서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안 해 본 사람은 절대 느끼지도 보지 못하는 즐거움이니까.

 정상에 도착하니 뼛속까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도 상쾌해졌다. 송림의 수백 그루 나무들은 적당한 간격을 맞추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하늘을 향해 서있는 모양이 무슨 선발대회에 나온 미녀들만 같았다. 쭉쭉 뻗은 몸매에 감겨드는 바람은 시원함과 짭짤함을 동시에 전해 주었다.

 아이들과 적당한 곳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잠시나마 편안함에 젖어 보았다. 한창 물이 오른 나무는 싱싱한 젊음을 발산하느라 잎들을 푸르게 푸르게 매달고 있었다. 푸른 물이 오른 나무 사이로 봄을 밀어내는 여름이 기세도 당당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계절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자니 문득 생각 하나가 기억의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무는 사람의 인생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나무의 1년의 변화는 마치 사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일치해서 조금의 더함과 빼냄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가 있는 앎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님의 밑에서 보호 받으며 살아가는 어린 시절은 나무에게는 봄이 아닌가. 커다란 나무는 부모와 같고, 새하얀 솜털로 뒤덮인 싹이 자라기 시작하면 따스한 햇볕과 바람의 보살핌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린다. 아이의 뺨처럼 보드라운 계절이 사람의 유년과 똑같은 것이다.

 성인이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혼자 일어서서 살아간다. 그때는 많은 변화와 시련과 실패, 용기와 도전, 세상 앞에 나서는 힘과 뜨거운 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나무에게는 여름이다. 싱싱하고 푸른 잎들로 뒤덮여 장마와 가뭄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나 시원한 그늘과 싱그러움으로 한껏 뽐을 낸다. 가장 활력이 넘치고 강한 힘을 가진 계절이다.

 어느 정도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가다 조금씩 어깨가 쳐지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뒤를 돌아보게 되는 중년의 시간. 인생의 성공 여부에 질문을 던져 보는 때가 나무에게는 가을이라고 말하고 싶다. 깊이를 더해가는 시간으로 뭉쳐진 계절이다.

푸르렀던 잎들은 연륜의 색깔 옷을 입고, 말라버린 잎들은 부는 바람에 버틸 힘이 없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소리 없이 가라앉는다. 계절의 뒤편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라면 자기의 소임을 다해 크고 좋든지, 작고 나쁘든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사람에게나 나무에게나 가을은 모든 것을 거두어들인다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놓은 일에 대한 결과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인생의 가을! 그것은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른다. 쓸쓸한 바람을 이겨내려는 몸짓으로, 눈빛으로 애가 타는 겨울을 준비하는 여정이다.

 늙어 간다는 건 까닭모를 외로움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텅 빈 집을 지키는 노인이 되는 우리와 텅 빈 마당을 지키는 나무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는 겨울의 추위와 을씨년스러움을 몰고 다니는 말라버린 가슴이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느끼는 무상함을 겨울나무라고 말할까. 그러나 온 세상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눈이 있기에 그리 힘들지만은 않다. 꽁꽁 언 땅을 적시는 눈은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전령사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들을 덮으며, 감싸며 시작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1년 사계절의 변화는 인생의 시계와 똑같이 움직이지만, 우리의 죽음 뒤에는 다시 태어나는 새 생명이 있기에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나무 역시도 겨울에는 죽은 듯해도 봄이면 고목에 새로운 싹이 나듯 새로운 시작을 한다. 그게 생명의 순환인 것이다. 삶의 거대한 바퀴인 것이다.

 나무 그늘아래에서 솔바람 향에 취해 인생과 나무를 생각해 보았다.

여름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으며 아이들을 재촉해 일어섰다. 뜨거워지는 삶 속으로 걸어가야 하니까. 그것도 열심히, 아주 열심히 걸어야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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