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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BY 박 소영 2008-01-15

새해 첫날

박 정 애

새해 아침 일어나니 빛이 거실에 가득하다. 한해 마지막 날 새벽까지 잠을 설친 탓이다. 다가오는 해 보다 지는 해에 미련이 남아서일까? 창문을 여니 한해를 시작하는 날이 유난히도 춥다.

tv에서 복 많이 받으라는 선심 공세가 방송사마다 요란함이 새해 첫날임을 실감케 한다. 남편은 바로 앞 동에 사는 아들 내외가 몇 시쯤 올까 기다리는 눈치다. 아들 내외보다도 손녀를 더 기다린다. 며칠 전 앙증맞은 손녀는 할아버지와 엄마가 콜록거리는 걸 보고 십자가를 잡고 “예수님 하느님 우리 할아버지와 우리 엄마 감기를 빨리 낫게 해주세요. 아멘.”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에 할아버지가 감동하였다.

모두가 예사로이 넘기는데 네 살짜리가 할아버지를 위하는 기도, 그 마음을 기특하게 여겨서이다. 언제부턴가 챙겨주기를 원하는 나이에 와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일들은 사회에서 가정에서 하나씩 하나씩 자연스럽게 그 자리서 물러앉게 된다. 아들의 직장이 우리를 아들의 부양가족으로 등재 시킨다. 건강보험증에도 남편의 직장이 아닌 아들의 직장명이 명백하게 적혀있다.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려니 준비 없는 세월이 무서워진다. 포효하는 맹수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한 발짝 한 발짝씩 소리 없이 다가오는 두려움을 내 스스로 대처할 능력을 길러야 할 나이다. 먹잇감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살아온 길이 아닌 다른 새로운 길을 찾아 억울하게 당하지는 않아야겠다는 공포감이 한해의 마지막 밤 꿈으로 연결되었다. 하늘에 퍼진 햇살이 아침잠을 깨울 때까지 잠에서 끙끙 거렸다. 새해 첫날의 황황함이 일 년 내내 이어질까 두렵다.

대학 측에서 분양해준 텃밭에 직원 주차장을 조성한다고 심어둔 농작물을 지난 12월까지 거두어 가라고 연락이 왔다. 차일피일 미루다 시금치 몇 뼘을 거두지 못했다. 찬바람을 탓하면서 새해 첫날인 오늘 밭에 갔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몇이 있었다. 옳게 자라지 못해 주인에게 선택되지 못한 배추며 잎이 누렇게 변해 제구실을 못하는 대파, 이런저런 푸성귀들이 주인 손을 기다린다. 우리 밭에 시금치는 겨울을 탓하지 않고 파릇파릇한 인물로 게으른 주인을 반긴다.

둔덕에 서서 오만하리만큼 자태를 뽐내던 단풍나무가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퇴색된 붉은 낙엽은 밭고랑에 굴러와 시금치 주변에서 서성인다. 화려했던 지난날의 흔적은 간곳없고 며칠 전 실비에 서걱거리던 울음 까지도 삼킨 채 시신처럼 누워 있다. 시금치는 지친 단풍잎 곁에서 뽐을 내고 있다. 연약한 뿌리지만 잎을 보호하고자 사철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동화작용을 하고 있다고, 단풍나무는 작은 몸매를 가꾸고 지킬 줄 아는 시금치를 부러워하고 있다.

수분이 충분치 않아 땅이 굳어 뜯기보다는 파야 했다. 굳은 땅 아래 내린 뿌리는 엉켜져있다. 한 포기를 파는데 서너 포기가 따라 나와 흙을 털어내는데 시간이 걸린다. 어려울 때 서로 상생하고 있었다. 양지바른 밭에 심은 시금치를 겨우내 조금씩 캐와 먹으려고 했는데 학교 사정상 한꺼번에 캐니 큰 비닐봉지 두 개가 가득하게 찼다.

다 캐낸 빈 밭에 미련이 간다. 작년 한 해 동안 남편은 텃밭을 분양받아 정성을 다했다. 무공해 채소를 재배하려고 산에 가면 잘 썩은 부토를 등산 가방에 넣어 오기도 하고 스티로폼에 음식물 찌꺼기 간기를 빼고 흙을 섞어 거름도 만들어 넣었다. 일 년 후 되돌려줄 땅이라면 그렇게 정성을 쏟았을까?

양손에 들은 봉지가 무겁게 여겨진다. 다시는 그 밭에서 채소를 가꾸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겨울을 탓하지 않고 파란 얼굴로 주인을 반기던 시금치를 깡그리 파헤친 기분은 수확의 기쁨이 아닌 몰살을 시킨 기분이다. 얼마 후면 파랗던 들판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주차 선이 그려질 빈 텃밭이 자꾸 뒤돌아 보인다.

살아가면서 비워 줄게 잠깐 정이 들었던 텃밭뿐이겠는가? 내 소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쉽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는 비울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이다. 어렵고 힘든 세상에 따뜻한 마음으로 사는 이웃도 많이 보면서 산다. 남이 하는 일에 감동을 하면서 정작으로 내가 비우기는 왜 이리 어렵고 미루어지는 일인가?

“마지막 날에 후회”를 어느 책을 통해서 읽은 적이 있다.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눈으로만 읽던 것이 가슴으로 닿아온다. 그날이 두렵다. 지금도 늦지 않는 나이다. 이 후회를 살아가면서 조금씩 삭여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살기위해 바쁘고 힘든 세상을 많이도 원망 하면서 살아온 세월이다. 새 아침 늦잠을 서두를게 아니라 여유로움으로 받아야겠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비좁은 머릿속을 좀 쏟아내고 아름다운 생각도 공존하도록 마음과 눈을 넓혀 지혜로움을 배워야겠다.

애초에 돈을 주고 샀던 밭도 아닌데 주인에게 당연히 돌려줄 밭이 아닌가? 한 해 동안 싱싱한 채소로 밥상을 풍성하게 해준 대학 측에 감사해야 한다. 한해 농사지만 작물에 커가는 기쁨도 맛보았고 다른 작물을 심어 서로 바꿔 먹는 정도 나누었고 농사를 짓는 방법도 서로 의논하면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해준 마음의 텃밭, 먼 훗날 아름다운 추억이 가슴 깊은 곳에서 파랗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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