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에게 박수를
박 소 영
“어이! 중학교 때 우리 반에서 61등 한 사람 누고 손들어 봐라.” 졸업한지 50년이 다된 친구들 앞에서 함빡 웃음을 머금은 채 자칭 61명 중 60등을 했다면서 한 등수 아래인 주인공을 찾는 그를 향해 모두 박수치며 주목했다.
이십 여리의 등, 하굣길이 너무 지루하여 여름에는 물고기, 가제,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기도 하였고, 겨울에는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다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논두렁을 태워 옷을 말리곤 했단다. 배고프면 도시락을 까먹고 서산에 해가 걸리면 서둘러 냇물에 세수를 하고 귀가했다는 동창은 그때가 그리워 숨어 놀던 산속 바위틈과 강변을 한 번씩 찾는다고 한다. 결석을 한꺼번에 하며는 들킬까봐 둘이서 조를 짜서 결석을 번갈아 하니 평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결석을 했다고 했다. 성적표를 받아보면 하위권은 언제나 그 무리가 차지했다고 하며 어린 날을 회상 한다.
6, 25 전쟁 시 나의 고향은 밤낮 공포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낮에는 경찰, 밤에는 공비의 등살에 남아날 것이 없었다. 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친구의 아버지는 공비의 적대적 표적이 되어 있었다. 빨갱이가 들이닥치자 뿔뿔이 흩어져 황급히 피신하는 바람에 미처 업고 나오지 못해 남아있는 어린애의 한쪽 팔을 공비들은 화풀이로 잘라버렸고, 그로인해 친구의 아버지는 결국 공비들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단다. 자포자기에 빠져 있는 친구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생을 가엾게 여긴 맏형이 동생의 소질을 보고 유명한 화가를 찾아가 공부는 죽어도 하지 않으려고 하니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했다고 했다. 형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친구는 얼마간 하다가 도망치듯 나왔다고 한다. 오만 허드렛일을 해가면서 배우는 그림공부가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산으로 강가로 다니면서 소를 먹이러 다니던 악동은 고향산천과 친구들이 너무 그리워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고향에 온 지 일 년쯤 지나니 사지가 멀쩡한 친구들은 산업화 물결로 기술을 배우거나 공장으로 떠나기 시작해 주위에는 놀 친구가 없었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시 형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다시 온 형과 친구를 보고 원로 화가는 눈앞에 서지도 못하도록 호통을 쳤다고 한다. 친구도 울고 형도 울기를 몇 날 며칠, 선생님의 화가 약간 누그러지는 틈을 타 무조건 그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한다. 타고난 재능을 발굴하여 수제자로 키우기 위한 스승의 집념은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린 교훈은 냉정함 아니라 포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고된 나날의 연속일 때 입술이 터질 정도로 깨물었다고 한다. 지금 포기하면 나는 정말 정신과 육신이 망가진 병신일 뿐이다, 내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그날까지 이 길을 가겠다는 결심이 어린 가슴에 무섭게 다가와 일 년의 공백 기간이 삶의 거름이었다고 한다.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자연이 선생님이다. 철 따라 동식물에 성장을 산속 물속에서 보고 배웠고, 씨를 뿌려 열매를 맺을 때까지 노력한 만큼 수확이 나는 농작물의 성장과정을 함께 하면서 자랐다. 긴 거리를 걷던 인내심은 지금도 등산이나 조깅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인간사다. 꼴찌를 자랑하는 동창은 동양화가의 대가로 80년대 동아일보가 뽑은 최고의 일인자인 화백이다. 인간의 잠재력을 끊임없이 발산하는 그의 능력은 중학교 때 논두렁을 불태우고 강가에서 고기 잡았던 즐거움이 한 폭에 그림이 되어 우리의 화단에 우뚝 서있다.
중학교 졸업장이 최종 학력인 친구를 대학 강단으로 불러냈다. 그의 피나는 노력은 보지 않았고 긴 세월이 흐른 후 꼴찌에서 일등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 숨겨야 할 꼴찌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변화된 그의 삶을 지금 모두가 부러워한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일수록 고생이 거름이 되어 맺어지는 열매는 값지다. 그는 친구들이 운이 좋았다 출세했다, 라는 소리를 제일 싫어한다고 한다. 장하다 노력 많이 했구나! 라고 바꾸어 말해 달라고 했다.
신념과 노력의 결과는 한국화단의 거목이 되었다. 가끔 tv에 나오는 그를 보고 친구들과 모여 그가 화두에 올라 참 출세했다고 한 말이 친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친구는 어려움을 가진 장애인을 위한 전시회도 몇 번 열었다. 그의 그림에는 고향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았다. 산과 들, 낯익은 시골집들은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있어 옛 정취에 빠져 보기도 한다.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가? 지금까지 살아온 굽이굽이 과정을 후회하면서 괴롭거나 힘들 때 남을 탓할 때가 자주 있었다. 그 상대는 남편일 수도 부모나 형제 일 수도 때로는 나와 가까이 지내는 주위 사람에게 까지 탓하기도 했다. 자기가 노력하고 투자한 만큼 결과가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친구를 통해 다시 듣고는 모두가 한마음 이였는지 조용하던 방안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 꼴찌는 여전히 친구의 궁금증으로 남겨두고 1번부터 61번까지 출석 번호를 잊지를 않고 기억하는 또 다른 귀재가 나타나 그때의 친구들을 기억하면서 또 한 번 박수를 쳤다. 고향 면사무소에서 퇴직한 친구는 출석 번호 중간 중간에서 8명이나 되는 고인의 사망 날짜까지 일러줘서 가슴이 아팠다.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를 의식 하면서 다음 만날 때까지 서로의 건강을 빌면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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