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묻혀가는 내 고향 집 박 소 영 어머니 기제 참석 차 친정에 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삼대독자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조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오랜만에 들린 친정이라 여러 안부를 주고받은 후, 조카가 "고모님! 오랫동안 방치해 둔 시골집을 군청에서 철거 해 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참 잘 했다. 흉가처럼 비어 있는 모습이 보기가 싫었었는데….”라고 말은 했지만 가슴이 저려왔다. 양지 바른 산 아래 첫 집이 나의 고향집이다. 자손 대대로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지세라고 당시 풍수가 말했다고 했다. 조금 외진 곳이긴 했지만 자손이 잘 산다는 터를 택해 고조부께서 나의 증조부인 둘째 아들에게 첫 살림집으로 물려주신 집이다. 재건축 재개발이다 하면서 20년 이상이 되면 법으로 인정해서 시골 한 군의 해당하는 가구 수인 아파트를 깡그려 뭉개기도 하는데 4대가 살았고 6대째 들어서는 고향집이 헐어지는 게 크게 잘못된 건 아닐진데 집이 헐어진다니 고향 자체를 잃는 기분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갖가지의 과일이 탐스럽게 익어 갔던 과수원집이다. 지금은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객지로 나가 비어있는 집들이 많다. 그래도 내 고향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옛 집들이 잘 보존되어있다. 그러한 고향이 항상 가슴 뿌듯했고, TV에 가끔 비치기라도 하면 나의 집인 양 누구네 집 누구네 집하면서 드나들던 대소가 댁을 보고 나이답잖게 흥분해 한다. 2대 독자였던 오빠는 효자였고 고향을 무척 사랑했다. 경제적 여유도 갖추고 살았기에 오십이 넘으면 고향 근처인 대구에 살면서 조상이 물려주신 집을 개수하여 별장처럼 꾸며 자식들도 자주 드나들게 하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오십을 넘기지 못하고 먼 곳으로 가 집안 대들보가 무너졌다. 고조부께선 왜 자손이 번성한 것보다 부자를 택했을까? 오십 문턱에 가신 아버지와 오십을 넘기지 못하고 간 오빠를 보면서, 단명과 독자로 겨우 대를 이어가는 친정집 가계가 마치 고조부께서 집터를 잘못 골라서 그런 듯 조상 탓도 해본다. 150여 년간 이어져 온 집, 주인 잃은 지 수십년, 오빠가 간 후 농사짓는 사람이 몇 번이나 바뀌더니, 아예 사람이 살지 않은 지도 10여년이 넘었다. 잘 보존된 집을 지나 내 눈에 들어오는 내가 자라온 집은 별장 터가 아니라 폐가의 잔해다. 누군가에 의해 통째로 뜯겨져 나간 대청마루의 문짝, 한쪽 용마루를 잃은 정침, 반쯤 내려앉은 사랑채, 추수가 끝나면 오곡이 소복소복 채워졌던 도장 채는 허기진 배를 드러내고 있다. 질서 없이 흩어져 있는 몇개의 옹기가 쑥부쟁이 속에 숨어 옛 장독대임을 알려준다. 달님, 별님들이 연꽃 사이에서 숨바꼭질 하던 연못은 반쯤 메워져 잡초들만 무성하다. 어느 한 곳도 그 옛날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았던 집은 아니다. 사랑 화단에 서 있던 동백, 하늘을 찌를 듯했던 측백나무, 연못가의 자두, 앵두나무, 측백나무는 나이테만 남아 긴 세월 동안에 함께 했던 고향집 역사를 말해주고, 동백나무는 흔적 없이 도망을 갔다. 잡목 사이에서 경쟁에 밀려난 자두 앵두는 영양실조에 걸린 듯 오갈병이 들어 과실수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랜 듯하다. 고목인 감나무만이 듬성듬성 자리를 지키면서 고향집과 함께하고 있다.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풋과일이 맛도 들기도 전부터 과수원에 과일을 주우려고 새벽 먼동이 트면 과수원 주변에는 아이들로 웅성거렸다. 가끔은 나무에 달린 과실을 따다가 할아버지께 꾸중을 듣던 아이들의 모습이 허물어진 빈집에서 어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추수가 끝난 11월, 고목에 달린 빨간 감은 서리를 맞아 홍시가 되도록 어느 누구도 거들 떠 보지 않는 천더기가 되어 있다. 사람의 온기와 정성을 못 받은 감 꼴이 탱자처럼 오그라들어 모두가 떠난 서러운 날들이 힘들고 괴로웠다는 듯 덥석 가슴에 안겨와 그 모습이 애잔하다. 조카는 과수원 외에 논밭의 위치는 어딘지 모른다고 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오빠는 고향에다 논을 사 모았다. 오빠의 유언으로 오빠는 과수원 복판에 누워있다. 저 세상에 가서라도 영원히 조상님이 물려주신 고향집과 전답을 지키려고 그렇게 하라고 했던가? 누운 오빠는 우리가 가면 발목을 잡는다. 해가 갈수록 손상되는 집을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에 사력을 다해 일어나려다 다시 누웠는지 상석(床石)이 기울어져 있다. 조카는 바뀐 농지법도 문제지만 너무 오랫동안 남의 손에 있었고, 농사지을 사람 구하기도 어렵다면서 토지를 팔아야겠다고 한다. 출가외인인 두 고모에게는 통보다. 고향길이 너무 멀어 때맞춰 산소 돌보기가 힘든다고 말한다. 오빠의 산소를 이장시켜 부근 성당 성지에 옮기려고 납골당을 분양 받아 놓았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며 보여 준다. 마음을 굳힌 조카는 제 아버지 유택만은 가까이 모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어머니! 조부모님, 증조님 세월 이길 장사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머잖아 고향 집은 잠깐 동안 굴삭기가 굉음을 내면서 서러움을 토하다 흔적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마지막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하고, 보기 싫기도 한, 두 갈래의 마음을 저 세상에서 헤아려 주시겠습니까? 할머니가 계셨던 어린시절, 몇 번 다녀간 아버지의 고향일 뿐, 어떤 향수도 조카에게는 없을 것이다. 반겨줄 그리운 사람도, 애틋한 추억도 없는 고향과 조상의 산소가 조카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이라고만 생각한 걸까? 조카가 논리를 세워 강조하는 말은 고향이란 의미보다, 재산가치의 효용성을 두고 따지고 있다. 그 점에서는 할 말이 없다. 단지, 조카의 소유에서 남의 소유로 넘어간다는 그 차이일 뿐인데 조카가 팔아야겠다는 말 한마디가 친정에 대한 모든 게 끝나는 듯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그리운 집과, 어머니가 분신처럼 가꿔 놓은 과목들을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할지라도 가슴 깊은 곳에 늘 행복했던 옛날을 묻어두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