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지에서 대화
박 소 영
며칠 전, 며느리가 휴가 때는 온 가족이 시원한 계곡에 가서 한 이틀 쉬고 오자고
저녁식사 후 말을 던졌다. 남편은 이미 동료들과 여행 일정이 잡혀 있었기에 나를 보고
같이 다녀오라고 했다.
출발 하루 전 며느리는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메모하면서 마트에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카트기에 필요한 물품을 담아가는 며느리 얼굴이 환하다.
항상 절약하면서 살아라. 라고 한 말을 의식한 듯 “어머님, 오늘은 저들이 근사한 저녁도
대접해 드리고, 돈 좀 쏘겠어요.”하며 그냥 눈감아 달라는 기색이다.
집에 와서도 며느리는 준비에 분주하다. 부지런히 장만한 음식을 아이스박스에 챙겨 넣고,
입고 갈 옷이며 물놀이 기구들을 일일이 보이면서 색상, 디자인이 어울리는지를 물어가며
마냥 행복해 한다. 너희끼리 가서 잘 놀다가 오너라는 말이 입안에 뱅뱅 돌았지만, 아이들
기분을 생각해서 그냥 따라 가기로 하였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어 놓고 계곡으로 갔다. 마치 산속 도로가 거대한 주차장 같았다.
쌍쌍이 아이들과 어울려 삶에 찌든 모습을 씻기라도 하듯,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좋아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저들을 향해 손 흔들어 놓고는 그늘에
서 책을 읽고 있었다. 혼자 앉아있는 내 모양이 측은해 보였던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
니가 말을 건넨다.
“누캉 왔능교?”라고 한다. “
아들 내외 따라서 왔습니다.”
“더운데 잠이나 자지 뭐할라고 따라 왔능교.”
“다음부터는 아들 내외가 가자고 하거들랑 따라 나서지도 말고, 체면치례로 하는 말
곧이곧대로 듣지 마소. 내사 아들, 딸 오남매 계에 따라왔지만요.”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주책없는 시어미로 본다. 짝지어주면 저들이야 어떻게 살든지 아들
가족에게는 관여하지 말라는 말을 동료들 간에 자주 나눴지만 세상을 더 사신 할머니까지도
당부하듯 하는 충고가 딸이 없는 나에겐 고깝게 들렸다.
앞으로 2 년 동안은 아이 양육과 조석 준비에 걱정하는 일 없도록 할 테니 부지런히 저축
하여 집을 넓혀 가라고 한 내 말에 아들 내외는 고마워하고 있다. 내 주위에서 모두가 말리
는 일을 감행했다. 남편도 나를 말렸다. 살 집 장만해 줬으면 됐지 왜 사서 고생 하려고 하
느냐는 것이 요지였다.
퇴직 후 정한 일 없이 지낸지도 오래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취미삼아 각 곳의 문화,
교육프로그램을 쫓아다녔지만 시간 메우는 일도 지겨웠다. 손녀 재롱에 푹 빠져 보고
싶었다. “어차피 하는 밥에 세 식구 수저 더 놓는 것은 큰 힘 아니다.”라는 말로 남편을
설득해서 아들이 사는 옆 동으로 이사를 했다. 내외가 나란히 시간 맞춰 밥 먹으러 오고,
직장에서 있었던 일, 손녀와 보낸 하루 일을 얘기하며 지내고 있다.
남의 가족이 내 식구로 동화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옛날부터 '시어미 용심은 하늘이
내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온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생활방식이 다르게 살아온 며느리가 내 마음에 쏙 들지 않듯이 며느리 또한 면면이 편한
시어미로 대하지 않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까이로 이사 하려는 뜻을 며느리에게 비쳤을
때 며느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곁에서 살면 서로가 몰랐던 단점이 눈에 잘 띄어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아이를 남에게 맡기더라도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말은 안했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도와주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나
도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너들이 보고 싶어 오려는 게 아니다. 내 손녀가 남의 손에서
커가는 게 맘에 걸려서 그런다.”라고 한 말에 내외는 입을 다물었고, 우리는 이사를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며느리는 내 곁으로 차츰 다가온다. 쉬는 날이면 우리 집에서 많은 시간
을 보내고 있다. 나 또한 내 몸이 자유롭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접어야 하는 부담과 아이
가 아프거나 보채면 힘에 겨워 후회스런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로 인해 집안 분위기도 살아
나고 자식을 위해 아직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능력이 행복하다.
“어머님, 힘드시죠. 오늘은 외식도하고 바람 쐬려 나가 봅시다.”라고 한다. 외식을 줄이
고 되도록 집에서 밥 먹는 습관을 붙여가라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 내외는 저들을 따라 나서
고 있다. 체면치례가 아닌 진심이란 걸 며느리 눈을 통해 읽었기 때문이다. 서로 부대껴가
는 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이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서 가족이라고 하는 끈끈한 연이 맺
어져 감을 느낀다. 김치를 담아 택배로 부쳐주는 멋진 시어머니보다, 얼굴 맞대고 하나하나
보이는 가운데 스스로 동화되도록 하는 시어미가 되고 싶다.
내 마음이 통했는지 여행 갈 때 눈치 주지 않고, 함께 가자고 조르는 며느리가 기특하다.
“어머님, 둘째가 생기면 넓은 평수에서 같이 살면 안 될까요?” “아니다, 지금과 같은
생활은 2 년 동안이다. 그 이후는 너희끼리 살아라.”라고 하며 시어미의 주가를 은근슬쩍
띄워본다.
아들 며느리가 함께 가자한다고 해서 덜렁 따라 나서지 말라던 노인의 충고가 보편적인
통념이라면 그 통념을 깨기 위해서는 서로가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딸이 없는 나로서
는 며느리가 딸의 자리를 대신해 주도록 그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나를 진단하면서 오늘
도 나는 저들이 받을 저녁상을 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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