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 갈무리
박 정 애
추석을 전후하여 남편은 부모님 산소에 성묘도 할 겸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는 시골집에가서 감을 따 온다. 부모님께서 손수 심고 가꾸셨던 감나무, 남편과 함께 자라와 지금은 고목이 되어 고향집을 지키고 있다. 농사를 짓는 분이 조금씩 주는 감을 남편은 무척 좋아하고 소중히 여긴다.
이런 마음을 헤아려 감을 깎았다. 좀더 있었더라면 좋겠다는 내 말에 며칠후 남편은 청도에가서 넉 접을 더 사왔다. 깎은 감을 굵은 실에 꿰어 빨랫줄에 주렁주렁 걸고 남은 것은 베란다에 꽉 차도록 널어놓으니 고향집 가을 풍경을 옮겨 온 듯 푸근했다.
곶감을 말리는데 정성을 쏟았다. 놓인 위치에 따라 말라 가는 정도가 달라 잦은 손질이 필요했다. 말랑말랑하게 적당히 건조됐다 싶을 때 고른 형태로 모양새를 내어 항아리에 껍질 한 층, 곶감 한 층씩 넣어서 덮어 두었다가 얼마 후 살펴보니 하얀 분이 고르게 피어 있었다. 옛날 할아버지께서 만드셨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흐뭇했다. 곶감은 담는 용기와 시기, 장소가 잘 맞아 떨어져야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다.
항아리에 그득하던 곶감을 손님이 왔다 갈때 조금씩 드렸다. 직접 만든 정성을 받아들고 모두 좋아하였다. 두 아들과 며느리는 항아리에 담긴 곶감을 대수롭잖게 꺼내와 먹는다. 온 정성을 다 쏟은 나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같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개수를 헤아려 놓은 것을 한 개씩 빼먹으면서 들킬까 맘 졸이던 때의 심정으로 항아리에 남은 개수에 나는 온 신경이 쓰인다. 남편도 몇 개쯤 남았느냐고 가끔씩 확인하곤 한다. 부모님 제사때 쓰도록 크고 보기좋은 것은 없애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식으로서 가신 분께 손수만든 작은 정성을 바치고 싶어하는 절실한 마음이 느껴진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친정어머니께서 자주 오셔서 아이들을 돌봐 주셨다.큰아이는 학년 전체에서 순위를 다투었고 작은아이는 그렇지 못했다. 자연히 큰아이 관계로 학교에 종종 가게 되었다. 작은 아이 선생님도 큰아이에 대해 늘 칭찬해 주어 나도 모르게 큰아이에게 더 관심이 갔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불러말씀 하셨다. "어미 노릇 잘 해라. 아이 둘을 두고 차별 말아라." 작은 아이가 "엄마 아빠는 나한테는 관심없고 공부 잘하는 형에게만 관심 있으니 나는 놀아도 괜찮아요."라면서 숙제도 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가놀기만 한다고 하셨다.
별 생각 없이 한 나의 행동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많지도 않는 둘을 두고 어미의 소홀함이 아이에게 상처를 줬나 싶어 그 후엔 조심했지만 지금도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은 아닌가 미안하다. 며칠 전 며느리가 "시숙께서 결혼할 때 조건 좋은 손윗동서가 들어오게 되면 어머니께서 형님을 더 예뻐하실 것인데 그러면 저가 속상하지 싶습니다."라고 자기 감정을 솔직히 말해 순간 당황한 적이 있다.
이미 내 가족이 된 며느리, 나로선 그만하면 됐다고 할 정도로 골고루 배웠다. 더욱이 자취하던 아들을 맡겨겼기에 짐을 벗은 듯 편했다. 그러니 며느리가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며느리는 앞으로 맞아야할 손윗동서에게 시어머니 사랑을 뺏길까봐 신경을 쓰니 어른 노릇에 새삼 더 신경을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적의 작은아이가 제 형과 차별된 애정을 느끼며 서운함을 외할머니께 표현했듯이 며느리가 미리부터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보니 지난날 어머니의 충고를 듣는 기분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풍성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다음해 파종을 위해 좋은 씨앗의 갈무리를 서둘러야 하는 철이기도하다. 씨앗의 충실도와 담아 둘 용기를 점검하여 통풍이 잘 되는 곳을 택해야한다. 내 인생의 갈무리 시기도 머지않아 다가온다. 어떻게 살아왔나를 한번쯤은 가늠해 볼 나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내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다. 내가 떠난 훗날 나의 존재는 내가 쏟은 정성만큼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이 나를 갈무리 해줄 것이다. 깊은 장방에 소중히 갈무리될지 마당 귀퉁이에 버려져 누구에게도 관심 밖이 될지는 나 하기 나름일 것이다. 똑같이 내 손으로 깎아 말린 곶감이 정성과 관심에 따라 한 쪽은 항아리에, 다른 한 쪽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