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재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사람의 이야기가
가장 많아서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어요.
좃선일보라는 인터넷 논객들의 표현에 웬지 짜릿한 통쾌감 같은걸
느끼면서 훌떡 훌떡 보던중에 장애인 뉴스라는 기사내용에
김갑재라는 이름이 들어 있더군요.
사회인사들과 장애인들이 자랑스러운 장애인이란 시상을
기사화 하고 올린 사진속에 갑재와 비슷한 장애인이
상장을 가슴에 안고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어요.
짙은 눈섶과 가지런한 하얀이가 갑재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사진안의 장애인은 갑재였습니다.
아...
갑재가 살아있었구나.
그리고 장애인 상도 받았구나.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정신없이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졌습니다.
그는 장애인으로서 굴하지 않고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기사가 제법 많이 떠 있었으며 누군가의 배려로 법원안에서
범죄청소년의 보호 기구의 대표자가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결혼도 해서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으며
늦게 얻은 아들이 공부를 잘 해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우수한 성적으로 그것도 일류대학교에서
학업을 쌓고 있다는 아름다운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갑재는 그로 인하여 자랑스러운 아버지 상도 수상했다는 기사도
아울러 올려져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감동으로 가슴이 울렁인적이 정말 있었던가.
약국을 했던 형의 부인인 형수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을 가로채어
갑재를 내 쫒아서 갑재네 식구가 겨우 겨우 산동네 사글세방에서
그것도 아내가 집나간 친구와 친구의 아들까지
건사해 가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그의 자랑스런 아버지 상을 더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기관에서 마련해준 지금의 아파트에서
아내와 아들 이렇게 세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률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순간을 그는 장애의 몸으로서 정상인들 못지 않게
헤쳐나왔다는 사실에 전률했으며,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늘 무거운 가방들을
들고 다녔던 그의 자아실현에 할말을 잃었습니다.
독한 자식이었습니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갑재가 이상하게 독하게 닥아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감동을 준 것은 고등학교 과정의 평생교육원을 다녔다는
그의 와이프가 쓴 생활수필은 나의 눈물샘을 얼마든지 자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용인즉 쫒김을 당한 그들은 너무나도 배가 고프고 누울 자리 없어
서럽고 힘들었지만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살았더니 지금의 영광을 주셨다는
꾸밈없는 글에 그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녀석도 독하지만 그의 아내는 더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부질없는 외출과 소득없는 아이쇼핑등으로 부르주아를 누리고 사는
이 여편네는 그만 저 깊은 지하 어디에로 줄행랑을 치고 있습니다.
나는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난 뭐지? 라는 물음속에 망연자실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