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서부터 구두를 신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렸을 적엔
신발로서는 고무신이 고작이었지요.
당시의 어르신들께선 하얀 고무신을 신으셨지만
우리 같은 어린애들은 거개가 검정고무신을 신었댔지요.
요즘 아이들이야 운동화 내지는
일찍부터 구두를 신는 경우도 드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때는 다들 그렇게 못 살았던 까닭으로
그러한 고무신을 신어도 누구 하나
흉을 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얼마 전 경찰청 앞을 지나가다가
한 켤레에 1만원 하는 구두를 두 켤레 샀습니다.
마침 구두가 낡아서 사려던 참이었기에
값이 헐한 때문으로 흔쾌히 샀던 것이었죠.
예전엔 저도 '메이커 구두'가 꽤 되었습니다.
당시엔 돈을 지금보다는 더 많이 벌던 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일마다 구두를 바꿔 신고 출근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 뒤론 영 그렇게 지지부진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지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합니다.
그런 연유로서 그간 구두는 죄 헐은 놈으로
한 켤레가 고작이었던 겁니다.
그제 직원과 점심을 먹으려
H 은행 뒤의 식당으로 가는데 일전 경찰청 앞에서
저에게 구두를 팔았던 아저씨가 이번엔 부부 동반으로
다시금 구두를 사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언뜻 반가운 마음에 동행한 선배에게
그 구두를 사라고 꼬드겼습니다.
"형, 내가 신어보니까 정말 좋아요, 형도 두어 켤레 사시구려."
저의 주장을 좇아 선배는 그 구두를 두 켤레 샀습니다.
고작 1만원짜리 구두를 팔았음에도 연신 고개를 꺾어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구두장사 부부에게
빙그레 미소를 화답으로 보내며 식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전래동화에 '우산 장수 아들과 짚신 장수 아들을 어머니'가 있었다지요?
근데 비가 오는 날은 짚신장사 아들이
장사가 안 되고 반대로 날씨가 좋은 날엔
우산을 못 팔기 때문에 그 어머니는
늘 그렇게 노심초사의 나날이었답니다.
헌데 그러한 기우 역시도 생각을 바꾼다면, 즉 발상의 전환만 있다면
충분히 긍정의 계기로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논지인즉슨 그같이 부정적 사관으로서
날씨가 좋든 안 좋든
'어느 한 쪽은 반드시 장사가 안 된다'가 아니라 거꾸로
'어느 한 쪽은 반드시 장사가 잘 된다'라고 바꾸어 생각한다는 겁니다.
비록 지금은 제 처지가 몹시도 빈궁하여
고작 1만원 구두를 신고 다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의 제 노력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빛을 발하리라 믿습니다.
그건 바로
'나는 이처럼 헐한 구두를 신는다지만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반드시 좋은 구두를 신게 하리라!'는
긍정의 의지입니다.
우산 장수 아들과 짚신 장수 아들을 둔
그 어머니의 긍정적 사관으로의 변화처럼 말입니다.
근데 이러한 저의 각오는 기실 저만의 생각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의 공통된 다짐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