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ituation 1.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입술까지 파르르 떨었다.
"미안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녀의
그러한 돌변이 이해되지 않았다.
연애 기간이 4년이나 된 우리 커플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그처럼 차가운 빙벽이 돼 버린
그녀는 내게 일방적 절교를 선언했던 것이었다.
순간 부아가 활화산으로 치밀어 올라
그녀의 뺨을 보기 좋게 올려 부쳤다.
"네가 겨우 이 정도 밖엔 안 되는 여자였더냐?"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분노를 제어키 어려워
술집에 들어가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그러자 조금은 평정심을 찾을 수도 있는 듯 했다.
하기야 나처럼 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불학의 빈부에게 뉘라서 귀한 딸을 주려 하겠는가!
situation 2.
"잘 다녀오겠습니다."
찌는 듯한 염천 더위 때 국가의 부름을 받은 아들을
논산훈련소에서 손을 놔 보내야했다.
"입영 장병 집합~!" 소리에 연병장으로 뛰어가는 아들을 보며
나는 다시금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부디 건강하게 잘 다녀오렴...!'
변변히 바라지도 못 하고 입대시킨다는 자괴감에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는 이 아비의 맘은
칼바람에 찢기는 것만 같았다.
situation 3.
"이틀에 한 번 꼴로 집에 꼭 전화하고...
밥은 제 때 꼭 챙겨먹고..."
아내의 상투적인 사랑의 지청구에
딸은 그예 귀를 막았다.
"제가 뭐 어린애인 줄 아세요?"
재작년 이맘 때 서울대에 수시로 합격한 딸이
상경의 짐을 싼 건 작년 2월이었다.
지지리도 못 사는 집에서 그같이 속칭
명문대생이 된 딸이었음에
나의 기분은 하늘을 나는 듯 했다.
하여 한 톨만치의 아쉬움도 없었다.
"어서 가. 가서 더 많이 배우고
좋은 선,후배도 많이 사귀거라." -
지금까지 세 개의 situation에 등장한 사람은
모두가 내 사랑하는 가족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굳이 안 밝혀도 되겠지만
첫 번째로 등장한 여인, 그러니까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간' 여인은
하지만 결국엔 다시금 나에게 되돌아 온
지금의 아내인 것이다.
아내는 처갓집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에게 '투항'했으며 아들도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친 뒤 지난 9월엔 대학에 복학했다.
딸은 겨울방학이 돼야 귀가할 터이다.
근데 아르바이트로서 둘이나 되는 학생을
가르치고 있기에 집에 와 봤자
이틀이나 자면 다시금 꽁무니를 뺄 게 틀림없다.
나는 일전 6년 간 근무했던 직장을 나와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다.
인생은 누구라도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가족들과는 그러한 과정조차 없이
영원히 회자정리의 무효지대(無效地帶)에서만
살고픈 게 나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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