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 문학을 창작하거나 연구하는 사람. 문학자. a literary man
친구가 문득 나도 잊고있던 옛날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 외에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개인적인 과제가 늘 있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편씩 글짓기나 독후감 쓰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작문과 독서에 남다른 관심과 집착이 있으신 분이셔서, 두 딸들에게도 그걸 극구 강조하셨더랬다.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원고지에 일주일에 한편씩 글짓기를 하는 그 일이 왜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는지, 아님 하기 싫은 과제였는지 나는 한번도 제 날짜에 제대로 하여 칭찬을 들은 적이 없었던것 같다. 늘 한바탕 야단을 맞은후에야 타의적으로 한편씩 제출을 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왜 친구들은 안 해도 되는 글짓기를 해야만하나 이유도 몰랐고, 억지로 시키시는 아버지를 참 많이도 원망했었다. 자라서보니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더만……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입학하면 학년마다 꼭 뭔가 자기 자신의 신상에 관한 것들을 써내는 절차가 있었던 것 같다. 더 어린 학년일때는 담임선생님께서 눈을 꼭 감으라 하시고는 ‘아버지 없는 사람 손들어.’ ‘어머니 없는 사람 손들어.’ 부터 시작하여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손들어.’ ‘집에 정원 있는 사람 손들어.’ ‘집에 … 있는 사람 손들어.’ … 이런 것들까지 일일이 파악을 하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째든, 자기 신상에 관한 것들을 써낼라 치면 어김없이 채워야 하는 문항이 ‘장래희망’ 이었다. 그건 교회 주일학교에서 조사할 때도 빠지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문학가’ 라고 적어내곤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도 그랬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 여덟살짜리가 대체 문학가가 뭐하는 사람인줄 알고 그렇게 자신있게 대답을 했더란 말인가? 당연히 그 대답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의견이었지만…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난 그 대답이 쑥스러워 나중엔 여자 아이들이 가장 흔히 말하는 ‘교사’ 로 대답을 바꿨다. 진짜 선생님이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단지 그 대답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교에 다니면서 항상 진로고민에 빠져 살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확고한 나만의 주장은 서질 않았다. 내가 정말로 뭘 가장 잘하는지, 어떤 일을 가장 오래 할 수 있는지, 어떤 일을 할때 가장 행복한지 결론지을 수가 없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만을 탓하며, 그리고 어릴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세뇌된 그놈의 장래희망 탓을 하며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전공을 바꿔 미국으로 유학을 오기에 이르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의 피는 점점 농도를 더해가는지, 이젠 글짓기 하라는 아버지가 가까이 계시지도 않은데 나는 열심히 일기를 적는다. (글쓰기 좋아하는 것도 유전인가?) 처음엔 미국생활이 신기해서, 외로워서, 연애를 하면서는 행복해서, 살림을 하면서는 내 자신이 기특해서, 육아를 하면서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늘 나는 뭔가 적을 것들이 넘쳤다. 적으면서 내 자신을 추스릴 수 있었고, 도둑 맞는 것 같은 세월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내 가족의 소중함에 더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일기는 나의 친구이자 없어서는 안될 거울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이렇게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연필 하나 종이 한장이면 몇시간 아니 며칠이라도 꿋꿋이 버티어 낼 수 있을것만 같다. 졸작이라 나중에 읽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래두 안하는 것보다 낫다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곤한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좀더 자상하게 글짓기 과제를 내주시는 이유를 알려주시고, 강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인도해 주셨더라면 좋았을거란 아쉬움이 든다. 그랬더면 조금더 미리 관심을 가지고 글짓는 공부를 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내 아이들에게 무언가 부모의 의도와 의지가 담긴 일들을 시키지 못한다. 큰 아이가 그림에 제법 소질이 있는것 같아 은근히 권면해 보지만, 내가 더 깨끗하고 좋은 종이를 갖다주면 오히려 만족스런 그림을 그려내지 못한다. 어디까지가 관심이고 어디부터가 강압인지 선을 긋기가 참 힘들다.
아, 장래희망이여!!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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