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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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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철 안든 형님


BY 그린플라워 2012-10-11

시어머님 49제로 다들 모였다.

시어머님 모신 절에 가서 행사를 치른 후 막내네 가서 뒤풀이를 하는데 형님이 제안을 했다.

"어머님 사시던 집을 우리 명의로 해주면 시부모님과 남편 제사를 지내겠다. 그리고 기제사만 지내고 명절제사는 못지내겠다." 고.

원래 시숙 상 치르는 중에도 "나 이제 제사 안 지낼 거야." 라고 동서들에게 선포를 했었는데

그런 말은 시기적으로 너무 빠른 게 아니냐고 우리들이 말렸었다.

 

제사는 지내고 싶지 않지만 집을 달라고 하려니 그래도 뭔가 해야할 것 같은지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리라.

우리 시댁은 3대봉사를 하는 종가로서 증조부님 제사부터 시아버님제사까지 모시는 집이다.

그렇게 되면 조부님과 조모님 제사를 안 지내겠다는 건데 시삼촌께서 생존해 계시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 것이다.

게다가 명절제사는 못지내겠다니...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내가 한마디 했다.

"앞으로 경제적인 건 내가 다 책임지겠다. 제사음식도 우리가 다 하겠다. 정 제사를 모시고 싶지 않다면 제삿날 큰집 세식구는 다른데 가 있다 오라." 고.

사실 제사 지낼 때 적게는 삼십만원 많게는 백여만원을 형님에게 주고 장보기를 하게 했다.

명절제사 때나 주말에 제사를 모시게 되면 대구에 사는 네째네가 봉고차에 각종 과일을 상자로 사고 생선 등을 넉넉하게 싣고 오곤 했었다. 형님이 장보는 건 10만원에서 20만원 정도 경비가 들 뿐이었다.

일도 우리들에게 시켜 놓고 형님은 밀린 빨래를 하거나 뭐 사러 갔다 온다고 나가면 일 끝날 때가 되어서야 나타나곤 했었다.

 

결론은 내가 장보기를 하고 형님은 손 끝도 까딱 안 해도 되게 하기로 했다.

아랫동서들은 다들 좋아라 했다.

장보기 하고 남은 돈은 우리가 모으고 있는 형제곗돈에 넣기로 했다.

집도 당분간 안 주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도 그집 탐내는 사람 없어서 형님네 줄 것이었지만 괴씸죄에 걸렸다.

 

형님은 혹 떼려다 혹 붙이고 갔다.

제사 때마다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이 집도 주겠다는 확답도 못 듣고 간 것이다.

시어머님 49제 일주일 후 시숙 49제인데 난 안 가려고 한다.

동서들도 하나도 안 가겠단다.

우리가 준돈은 벌써 다 썼는지 49제 지낼 돈도 없어서 그냥 간단한 제수 마련해서 납골당에서 지낼 것이라고 했다.

평생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네식구가 펑펑 쓰고 살더니 이제 망자 제삿상 차릴 돈도 없이 살게 된 것이다.

애들아빠는 돈을 다 주지 말고 49제 올릴 돈은 빼고 줄 걸 그랬다고 후회를 했다.

예전 같으면 돈이 얼마가 더 들던지 우리가 또 지내줬을 것이다.

그런데 시동생들도 마음이 돌아섰는지 아무도 그러겠다고 하는 이가 없다.

 

이제 당분간은 아무도 경제적인 원조를 안할 모양이다.

이런 경우를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걸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