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풀 먼지만 나던 마른 가슴이 가을비로 촉촉하게 젖는다. 예고도 없던 바람이 몰려온다. 빗줄기가 바람을 만나 파도타기를 하며 유리문에 부딪치고, 부딪친다.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의 쓸쓸함인지, 스산하게 부는 바람 때문인지 감정에 날을 세워 남편과 사사건건 엇나갔었다.
뚜렷이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남편과 집을 나섰다. 목적지를 정해 길을 떠난다면 시간이 절약되고 비용을 절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는 일이 궤도 수정인 것을, 계획된 대로 인생 길을 갈 수 있다면 절망도 없겠지만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고통 받지는 않을 것이다.
차를 세운 곳은 재래시장 앞이었다. 시장 입구의 포장마차에서 닭꼬치와 뜨거운 어묵 국물로 허한 속을 채웠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고 '픽' 웃음이 나왔다.
시장을 '꽉꽉' 채우는 한 음이 올라간 삶의 목소리가 늘어진 어깨를 세우게 한다. 고들빼기다발이, 연둣빛 고운 애호박이, 무장아찌가 남편의 발을 오래 잡는다. 흑미와 검은콩, 기장쌀을 조금씩 사자고 한다. 지난해 오일장 좌판에서 사온 유효기간이 넘었을 냉장된 잡곡에 생각이 머문다. 생각해 보니 애호박에 새우젓을 넣어 끓인 국을 남편은 맛있게 먹었는데 그걸 참 오래 잊고 있었다.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 되지만 함께 있을 때는 촌수조차 없어 무 촌이다. 늘 함께 하기에 그만큼 속 심(心)을 잘 알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는 있지만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모르고 지나친다. 부부는 함께 있을 때는 서운한 일만 생각나서 신뢰를 허물지만 한사람이 가고 없는 경우에는 그게 아니게 된다. 남은 사람은 가고 없는 사람이 남긴 좋은 기억만을 떠올린다. 받은 만큼 좀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빚으로 남아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한다.
돌아오는 길에 장자골 쉼터에 들렸고 가을을 한아름 안았다. 휴대전화를 통해 투병 중이셨던 당숙어른의 부음도 함께 안아야 했다. 시월에 내리는 비가 젖은 가슴을 더욱 아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