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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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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속에 담은 행복


BY 해빙기 2008-10-18

습관처럼 찻잔을 꺼낸다.

커피 통을 찾아 열고 한 수픈, 두 수픈, 잊고 산 기억을 커피 추출기로 옮겨 담는다. 세월의 두께를 밀어내듯 김이 오르고 마음 속 깊이 갈아 앉았던 기억도 나풀대며 함께 날아 오른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힘껏 움켜잡아 본다. 잘려나간 시간이 잡힐 것 같아서-눈을 감으면 어제 일처럼 단발머리 여학교 시절이 크로즈-업으로 다가선다.

수업을 마치고 하교 때는 늘 지쳐 있었다. 무거운 가방 속에서 빈 도시락은 왜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냈는지. 수저 구르는 소리가 심해질수록 걸음은 빨라졌다. 이십 리 길을 달음질쳐 가고 와야 했기에 항상 배가 고팠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허기짐을 채우는 일이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잘 가던 빵집이 학교 옆에 있었는데 그 집 빵은 아주 작아서 한 입에 쏙 들어갔다. 맛 또한 혀끝에서 척 감겨들기에 백 원에 열 개인 빵을 다 먹고도 아쉬움이 남아 딱 하나만 더 먹고 싶은 충동이 늘 일었다. 하지만 접시 한 쪽에 붙은 설탕가루를 손끝에 찍어 입 속에 밀어 넣으며 일어서야 했다.

빵집에는 키가 커 보였던 주인 남자가 잘 부풀어 오른 반죽덩이를 밀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매만지듯 정성을 다해 작품처럼 동굴동굴 예쁜 빵을 빗는다. 부부가 함께 일을 하면서도 마주보는 눈길이 따뜻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바라보는 나까지 즐겁게 했다.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가끔은 빵집의 맛을 흉내내려 밀가루 묽게 반죽한 것을 빵 틀에 부어 보기도 했지만 정말 힘들어했던 것은 몸으로 오는 배고픔이 아니라 정신적인 허기였다.

빵집 부부의 하루가 어지럽게 곡예를 하는 날에는 보리 알이 둥둥 뜨는 숭늉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잠이 들고는 했다. 그런 날 배는 고팠지만 행복해지는 꿈을 꾸기도 한다. 빵집 가족의 단란한 웃음을 어린 마음에도 무던히 부러워했다.

끊임없이 세월이 더디 감을 안달하였고 스무 해를 기다렸다. 식구가 많았던 우리 집은 진정한 의미의 가족 구성원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이 번성하지 못한 것에 걱정이 많으셨기에 당신이 펼친 우산 속에 식솔 모두가 있어야 비로소 안심을 하셨다.

대대로 터를 일구며 뿌리 내렸던 고향을 떠나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화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십승지지를 찾아 할아버지는 전국을 구석구석 헤매고 다니셨다. 따지고 보면 손이 귀한 집안의 번성을 위한 자구책에서였다. 시집간 고모까지 들어와서 사는 형편이고 보니 집안은 늘 어수선했고 분주했다.

언덕의 밑둥을 파서 만든 식품 보관용 굴 속에는 크기가 다른 김치 독이 오십 개가 넘었다. 규모가 큰살림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만을 강요했다. 삶 자체가 고생을 넘어 고행이었고 언제나 어머니는 '보리사' 미륵불처럼 표정 없는 모습이다. 웃음소리마저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집안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하루가 무사히 넘어간다 해도 폭풍전야처럼 가슴을 졸이는 날이 많았다. 조부의 고함 소리가 대청 마루를 뒤흔들면 어머니는 부엌구석 나뭇단 옆에서 숨소리도 죽여가며 나를 안고 밥 많이 먹고 어서 커야 한다고 재촉을 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세월은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한 지붕아래 살면서도 아버지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어머니에게 참으로 무심했다. 어머니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가끔 밥그릇에 물을 부어 상을 물리는 걸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식구 중에 밥을 남기는 사람이 없으면 어머니는 눌은밥이나 그것도 없는 날에는 굶어야 했다. 아무리 넉넉하게 밥을 지어도 부족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여전히 밥은 모자랐지만 어머니는 집안식구가 먹을 한끼 분량의 보리쌀이 담긴 함지박에서 한 줌의 보리쌀을 덜어낸다. 밥이 모자라면 식구 단출한 집에 딸을 시집보낼 수 있다는 속설을 어머니는 희망으로 삼으셨다. 어쩌면 당신의 삶이 딸인 내게 그대로 이어질까? 늘 그것이 걱정이었기에 어머니의 잣대로 비방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결혼은 했지만 나 또한 허기진 사람처럼 남편을 기다리는 일로 지쳐갔다. 일 년이면 절반을 외지로 떠돌아야 하던 남편이었다. 남편은 '여기는 서울, 부산' 이렇게 있는 곳을 알려왔다. 그러나 왜 그곳이냐고 반문할 수가 없었다. 아빠를 찾는 아들에게 불어터진 라면 줄기를 입 속에 넣어주며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많이 먹고 어서 커야지' 아들애를 달래고는 하였다.

스무 살이 되면 막연하게나마 내 인생이 확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어머니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세월이 내게도 왔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 없이 어머니의 세월을 그림자처럼 뒤밟아 가는 모습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눈 맞추며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소중하기만 한데 여전히 내게는 희망사항으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밥그릇에 물을 부어 어머니 마음을 헤아렸듯 밥보다 빵을 더 잘 먹는 나를 위해 남편은 집에 오는 날이면 열심히 빵을 사 나른다.

꺼칠한 모습으로 들어서는 남편은 땀으로 옷이 후줄근히 젖어 있었고 여기저기 멍자국 투성이다. 치열했던 시위현장을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남편의 모습이 마음 아파 바라만 보고 있는 내게 종이 봉지를 건넨다. 그 모습에 그 동안 서운하던 감정이 일시에 풀어지기도 한다. 서로 달라붙어 엉망이 된 빵을 하나씩 떼어내 저녁으로 대신한다. 그제야 허기졌던 가슴으로 사랑이 가슴 뜨겁게 전해옴을 느끼며 그리움으로 고여있던 시간을 마시게 된다. 찻잔 바닥에 앙금처럼 갈아 앉은 또 하나의 날은 멀어져가고…….

이제는 불혹의 문턱에서 올려다보기만 하던 세월을 뒤로 하고 서서히 내려서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