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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춤의 도시 안성(3)


BY 해빙기 2006-12-21

모든 건축 양식이 후대에 갈수록 가벼워 보이고 화려해지는데 반해 봉업사 당간지주는 그 룰에서 비겨나 있다. 신라시대는 위쪽과 아래에 구멍을 파고 나무를 끼어 넣어 넘어지지 않도록 전체적인 균형까지 신경을 썼지만 이곳은 지주 끝에만 위로 길게 뚫고 당간을 거는 杆構(간구)를 설치하게 하였다.
  당간에는 검정. 빨강, 초록, 흰색, 노랑의 오방색 기가 걸리게 된다. 검정은 방위로 북쪽을 계절로는 겨울이 된다. 빨강은 맛으로는 쓴맛이 되고 숫자로는 2와7의 의미를 담게 된다.
  황색의 기가 걸려있다면 부처님의 설법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다. 또한 당간의 기는 지나가는 손이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에게는 절을 안내하였으며 이정표가 되었다.
  여러 절을 다니다 보면 당간은 없고 덩그렇게 남은 지주만 보게 된다. 많은 당간이 당백전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수난을 겪은  까닭이다. 발행되기 시작해서 반 년 만에 주조가 중단되고, 유통까지 중단 된 당백전은 문화재 멸실의 일등공신이었다.
  무소불위 흥선대원군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당간이 없는 지주사이로 5층 석탑이 확연히 들어온다. 지주와의 거리로 볼 때 석탑의 자리가 현 자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간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입구에 있고 법당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법당 앞에 석탑이 서 있게 되는데 그 거리가 너무 가깝게 있다.
  석탑은 밑받침 기단으로 터를 다지고 다시 기단을 올려 이중 기단을 만들었다. 이런 구조는 고구려에서부터 전래되어 오던 기술이고, 1층과 2층의 기단이 같은데 이것은 고려 초기 양식으로 보면 된다.
  1층 몸돌 정면에 아래로 직사각형의 문을 조각하였다. 이 문 안은 감실(불감)로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근세로 올수록 홈을 파지 않고 자물쇠를 조각하는 것으로 문을 대신하게 하였다.
  5층 탑, 1층에 부처님이 계심은 2층이나 3층으로 올라갈 수 없는 탑 이기 때문이다. 탑도 올라갈 수 있는 탑과 올라가지 못하는 탑으로 구분한다. 대개는 올라가지 못하는 탑이다.
  올라갈 수 있었던 탑으로는 황룡사9층 목탑을 들 수 있다. 탑신은 몽고침략으로 불타 버리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진천읍 연곡리에 보탑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목탑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절로 불사를 하였다. 황룡사9층 목탑을 본 땄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목탑으로 유일하게 올라 갈 수 있는 탑이 보탑사(보배로운 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음) 목탑이 아닌가 한다.
 탑을 올라 갈 수 있다, 없다는 탑신을 보면 알 수 있다. 탑신에 난간을 만들었으면 반드시 올라가게 만든 탑이 란다.
  신라의 탑은 나무 집을 짓듯이 각을 내었지만 이 탑은 기둥에 문양을 하지 않아 부처의 집이다 하는 표현이 약하다.
  탑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1층 돌 보다 2층 몸돌의 부식이 정도가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1층 몸돌이 더 단단한 돌인 것은 다시 말하면 과학적인 방법으로 탑신을 올렸다는 이야기된다.
  몸돌 위 지봉 돌에는 다섯 개의 줄을 조각하였고 지붕마다 귀솟음을 하였다. 한옥의 아름다움 중 하나가 귀솟음이라 했다. 중국에서도 귀솟음이 있는 집은 우리나라의 집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
  지붕돌 귀솟음마다 구멍이 뚫려있는데 여기에 풍경을 달았으리라. 곡조가 없는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였다. 풍경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한다.
  풍경소리를 천상의 음성으로 알았던 선인들은 종을 주조하면서 비천상을 넣었다. 서양의 천사는 날개로 하늘을 날았지만 동양의 비천(천사)은 날개가 없고 천의로 하늘을 난다.
  비천상 앞에서 그 신비함과 천의의 아름다움에 미혹되기 일쑤이다. 마음에 울리는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죽주산성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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