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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춤의 도시 안성 (2)


BY 해빙기 2006-12-21

안성은 청주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다.
경기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충청도와 맞닿아 있는 까닭에 종종 충청도에 편입되었다가 경기도로 돌아가고는 하였다.
안성은 충북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기에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런 지리적 요건을 갖춘 탓에 팔도의 물건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문화의 접경지대로써의 역할을 하게 된다.
  안성에 들어서자 '안성맞춤의 도시 안성'이란 글자가 먼저 반긴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은 안성의 유기그릇과 가죽꽃신이 유명하여 생겨났지만 한때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 있다'로 통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교통망이 발달하면서 그 유명했던 안성장도 지금은 그 이름 값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비봉산 자락의 이죽면 봉업사터에 도착하였다.
  봉업사가 언제 창건되고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폐사 된 봉업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 사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서 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죽산현 고적조'에 봉업사는 비봉산 아래에 있다.
고려 때의 태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는데 공민왕 12년 2월에 거가(왕이 탄 가마)가 청주를 떠나 이 절에 들려 眞殿을 참알(參謁,참배)하였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고 한 기록이다.
  기록이 남아 있다, 또는 없다, 에 따라 문화재로써 가치가 달라진다. 기록이 중요한 것은 비밀의 문을 열게 한다는 데 있다. 그 시대를 알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봉업사는 고려 개국조인 태조의 진영을 모신 진전사원이었던 것이다.
  진전사원이란 왕실의 의지에 따라 죽은 왕의 진영(畵像·화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복을 빌었던 절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願刹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원찰. 창건주(創建主)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하는 절. 진영(眞影)을 모신 건물을 중심으로 할 때에는 원당(願堂)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진전사에는 사찰 호위군인 위숙군을 상주시키고 적절한 시혜를 베풀었다. 태조의 진전사원은 개성의 봉은사, 논산 개태사, 안성 봉업사 등 여러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으로 보아 적은 규모의 사찰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봉업사는 山寺(산사)가 아닌 드물게 넓은 들판 가운데 있다.
  봉업사지 터를 등에 지고 앞에는 차도가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안성시내로 들어가고 왼쪽이 일죽으로 나가는 길이 된다.
  사찰 주위가 넓은 들판으로 빙 둘러 있어 사찰을 규모를 짐작케 한다.
  덩그렇게 남은 당간지주가 답사 온 이를 맞이한다. 당간지주는 특별한 장식은 없다. 만든 시기가 고려 초기 때로 보지만 신라 때 만든 당간지주보다 만든 솜씨가 둔탁해 보인다.
 모든 건축 양식이 후대에 갈수록 아름다워지는데 봉업사 당간지주는 그 룰에서 비겨나 있다. 신라시대는 위쪽과 아래에 구멍을 파고 나무를 끼어 넣고 넘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곳은 지주 끝에만 위로 길게 뚫어 당간을 거는 杆構(간구)를 설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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