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수술을 세번 하시고 며느리 넷 중에 유일하게 남은 며느리인 나는 좀 살림도 못하고
돈도 잘 못 벌고 게다가 못생겻으니 뉴구에게 자랑도 못하실테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싹싹하게 살림을 잘하던 막내 며느리가 이혼하고 떠난지 벌써 칠 년이 넘어간다.
그 때 낳은 조카가 벌서 일곱살이 되었다.
아버지가 암은 아니지만 왼쪽다리가 퉁퉁부어 다시 입원을 하셨다.
전엔 그냥 며느리로서 입원한 시아버님였는데. 지금은 간호사인 나와 아버지는 환자로 병원에서 뵈니
좀 더 아버지 건강을 살펴 드릴 걸 이런 생각을 했다.
항생제로 다리에 생긴 염증을 말리운다는데. 이걸 안 놔드릴 수도 없고. 그냥 자가 면역치료를 하지니 더디게
진행하는 치료는 급한 성격인 아버지하곤 전혀 뜻이 안 맞으시다.
얼른 주사 한 대 맞기만 하면 만사가 오케이라는 빠른 치료법에 제일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신다.
내 생각엔 암이 전이 된 것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한 겨울에도 익은 김장 김치보다 금방 무친 겉절이를 좋아 하시는데, 나보다 더하면 더한 살림치 울 시어머니에게 뭘 해오라고 주문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맛이 없던 말던 우선 내가 해드리고 말자 이렇게 되버렸다.
"아버지 맛이 없어도 이거 드셔야 해요.약보다 더 좋은 것이니께.."
" 보약보더 더 좋은 나물 무쳐 왔어요"
처음엔 이거 다 니가 한 거냐? 하시는데
말씀이 맛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뜻일게다.
그래도 안 해오시는 어머님보다 못난 며느리라도 해오니 그게 어디냐고 하고 싶지만
한 두해 같이 견딘 세월도 아니고 말씀을 안드려도 다 아신다.
얼마전에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남편의 친구가 나한테 전화가 왔다. 애기의 주제는 아버지가 얼마 전에 땅을 파셨단다.
큰 며느린 나에게 알고 있었냐고 한다. 나는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남편이 애기 안하냐고 밭에 심어 둔 더덕이며 감나무를 어떻게 할 건지 남편에게 물어 보란다.처음엔 어리벙벙하더니 나중엔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
" 어버지의 것이니 아버지에게 문의를 하세요?"
그 후로 두 번 다시 남편에게, 시집에 땅 판 애긴 절대 안했다. 아버지것은 아버지 마음대로 하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잘 버는 자식이었으면 부모님의 생활비며, 용돈을 대드려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한거며, 그나마 시집이라도 잘 사니까 나한테 손을 안벌려도 서로가 얼굴 붉힐 일도 없을 것이고.
살아 생전 당신 재산으로 어려움 없이 잘 사시다가 가셔도 된다는 내 생각이었다.
수 없는 목숨을 장례식장에서 치룰 때 죽은 부모 관 앞에서 형제 재산 싸움하는 것도 몇 번 보니까
살이 생전 재산 관리 잘하시고 돌아 가시는 것도 남은 자식들 두루두루 복 주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꼭 지금 현금으로 부동산으로 받아야만 물려 받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꼭 말로 해야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들이 더 많다.
어머님이 나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도 울어머니는 새끼 놔두고 나간 년은 나쁜년이라고 하신다.
하나도 아니고 그 나쁜년이 어머니에겐 셋이나 된다. 어쩌다가 나는 아직 거기서 빠졋다고 해서 좋은 년은 아니다.
당신 생각엔 아직도 그건 미지수라고 하실거다. 세월이 흐르니 고부간에 그렇게 껄끄럽게 깔린 생각 차이들이
이물없게 되버렸다. 이젠 나도 울 어머니보고 그런다.
"에구구 엄니 긍께 누가 나간 며느리 믿으래유? 그냥 밉던 곱던 엄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 하세유?'
어찌됏든 뜬금없이 어머님이 그런신다.
" 야야 아부지가 땅 판거 네 형제한테 골고루 나눠 준다는디 난 셋째한텐 안 주고 싶다야?"
어이구구..벌써 편부터 가르신다. 받을 사람들은 이미 법적으로 확실한데 어머님이 아무리 그런시다고 해도 돈은 아버님이 줘야 받는데.
얄미운 자식이라고 주고 말고 당신 생각대로 했다간 편지풍파 자명하게 확실하다.
" 아이구 엄니 어디서 그런 애길 절대 하지 마셔유? 글고 어버지 반찬 좀 해가지고 좀 병원에 오셔유? "
같이 살면서 서로 잘 해야 하는 것들 중에 할 수 있을 때 해야 그래도 후회가 적을 것 같다.
어버지가 영양탕을 좋아 하시는데 이거 내가 탕을 잘 못 끓여서 한 번 검색을 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