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로 대충 대충 살다가 가도 그만이지...
누구에게 알아 달라고 사정을 안해도 그만이고.
귀찮은 안부 묻지 않아도 되니 한가롭고.
여름여행은 시작한다거나 그 어떤 계획도 없이 시작했었다.
처음은 먼저 떠나 보고
가다보면 몇 번 길 물어 볼 필요없는 발길 닿는 데로 눈길 가는데로
이어진 산맥이 겹쳐져 어깨 높 낮이에 끊어질 듯 하더니 또 이어진 능선을 따라
처음 보는 하늘색을 보고야 나는 이렇게 보이는 하늘이 또 있구나 했다.
두꺼운 책들을 몇 권 가져갔다.
읽다가 지치면 목침처럼 몇 권을 포개서 낮은 나무그늘 아래에 있는 평상을 골라서 누워 있으면
겹겹히 겹쳐진 연두빛 잎새들이 하늘을 투명하게 쪼개 놓은 빛놀이를 눈부시게 해 대었다.
이제 막 태어난 참매미가 변태한 껍질이 나무등걸에 박제처럼 붙어 있다.
분명히 몇 년동안 별러 온 여름이었을 것이다.몇 날 몇 칠을 두고 두고 아껴온 시간을 위해 쏟아낸다.
누군가를 찾아 빛처럼 번쩍이는 뇌성이라는 것을 간절하게 알린다. 내가 이제 왔소...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매미는 온통 서라운드 오케스트라 음악보다 더 웅장하게 첫 연주를 터트리는 중이다. 나는 그동안 매미가 우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여러마리인데도 목소리는 제 각각 특색이 있다. 굵고 짧게. 한동안 숨모으고 우르르 북처럼 길게 암호처럼 빙둘러 공간을 흔든다.
맴 맴 운다는 매미는 너무 천편 일률적인 우리들의 착각이었다.
고루 고루 순서 맞춰서 소리내는 몸통이다. 천연의 악기다. 지휘자 없이도 어느 매미는 낮은 음의 첼로현을 둥둥 터트리는 것처럼 낮게 포복을 하고, 모르스부호처럼 짧게 길게 느려주는 장단도 고수들이다.자신들의 짝을 찾기 위한 몸짓이다.
하필이면 그 때 소나기가 내린다. 나뭇가지부터 맞는 비에 연두잎에서 푸른물이 뚝뚝 떨어진다.
모두 축축한 습기를 만나서 잠시 중지 된 그들의 세계는 침묵중이다.우선멈춤의 세계다.
저렇게 사는 모습을 여지껏 모르는 나도 그제야 그들에게 들킨 것처럼 부끄럽다.
남이야 얼치기든 아니든 뭐든 간에 잠시 상관하지 않아도 잘 살아 내는 세계인 것을.
같이 사는 존재임을, 또 같이 숨쉼을, 여름여행은 조용히 떠나야 그들이 기다린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내가 조용히 그들을 지켜 볼 때 한 겹씩 한 꺼풀 열어주는 세계였다.
이젠 또 가을이다. 또 가을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렇지만 떠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내 몸은 가을 속에 물들어 살아 버렸다.
떠나지 않아도 저절로 나에게 온 가을은 총천연색으로 내 주먹보다 더 크고 단단한 주황색 단감에 짓푸른 감잎이 낙옆이 될 준비를 천천히 보여주고 있다. 키작은 단감나무 밑에서 까치발로 겨우 세워 따먹고 그늘 짙은 땅바닥은 황갈색에 가름마처럼 골을 타고 빗어 내린 넒은 들판에 노란색 익은 곡식이 온통 천지로 발라져 있다.가을 햇볕은 잔인하다. 더 익으라고 더 성숙해지라고
따갑게 찔러대는 곳에 얼굴이 날이 갈 수록 무거워 모가지가 자꾸 자꾸 땅으로 향하는 해바라기가 겸손하게 절을 하고 있다.
가울저녁에 소소한 바람이 분다. 가을저녁은 이르게 오는 무렵엔 산꼭대기에 반쯤 걸친 석양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때 지구는 돌고 자꾸 오른쪽으로 붉게 붉게 흐트러지는 물감을 풀어 보라색으로 분홍색으로 흩어진 구름사이 사이에 점 점 까만점으로 나는 오리떼가 낮게 흐르는 강가에 우르르 몰려 다닌다. 말없는 햇갈대들이 일제히 한쪽 바람 결에 휩쓸렸는데.
떠나지 않아도 내가 가지 않아도 늘 오는 것을 여태 몰랐다. 옆에 있어도 귀한 것을 모르는 바보같이.
미안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사랑 할 것이다.
미안하다. 그래도 사랑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