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 눈 한쪽이 시간이 지나니 이마까지 보라색으로 번진다.
내 친구는 권투선수가 아니다. 직업이라면 결혼 19년 된 가정 주부다.
아침먹고 내 친구 옆에 태우고 난 사무실로 출근했다.
못 들어간단다. 나만 볼 일 보고 오라고 한다. 차 안에 그냥 기다린다고 한다.
난 조회보고만 듣고 대충 서류만 살피다가 창문에 서있는 작은 화분에 선인장을 얼핏 보았다. 가시가 돋힌 시퍼런 언어.
기분도 기분이지만 조금 있으면 친구를 데리고 가정폭력상담소에 동행 해야 한다.
벌써부터 뒷 목이 뻣뻣하다. 부랴 부랴 일을 뒤에 두고 차에서 기다리는 내 친구를 향해 달음박질 치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일층에서 이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나를 더욱 성급하게 재촉하는 것 같았다.
" 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 오늘은 별일도 없더라..."
가는 길목에서 차가 정체되고, 조금 막히면 마구 뭐라고 떠들어 대던 내 친구는 입이 붙었나
되레 내가 입이 근질근질하다.그래도 참아야 한다. 괜히 말 봇물이 터지면 난 주체를 못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같이 걷는데 그제야 한 마디 한다.
" 기막히군... 내일이 결혼 기념일인데. 오늘 이혼하러 가는 여자다. 내가..."
뭐? 그러고 보니 나하고 같은 오월에 결혼한 친구라는 걸 알았다.
그럼 결혼 기념일 지내고 이혼하러 갈래?
친구는 도리질을 한다. 이 번엔 굳은 마음을 먹었나 옛날처럼 길길히 난리도 피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민망하다.
들어 가보니 이미 상담원이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상담원은 내 친구 얼굴보더니, 또 내 얼굴보고 그런다.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관계는 무슨.. 예 소꿉친구이죠.이 친구가 충격을 당해서 말을 잘 못한다고 해서 저에게 보고 들은데로 그대로 애기해달라고 해서 동행을 했는데요.
아 그러세요. 여기는 피해 사실확인서를 발부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혼을 하기전 구타나 폭행을 당하면 그런 사실을 진술을 하면 우리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재판이혼을 하게 되면 법진행비용은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고 ...
이러는데 느닷없이 내 친구가 그런다.
염병할! 맞아 가지고 눈텡이 퉁퉁 부었는데 뭔 사실을 확인한다는 거예요. 지금 내 눈에 내가 일부러 분장하고 나타난 건 줄 알아요. 그리고 내가 안 산다고 하면 그만이지. 뭐이 재판이고 뭐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내가 지금 들으러 여길 온 거 줄 알아요? 시방?
상담원이 당황하고 나 또한 수습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다.
그건 그랬다. 다리가 분질러져 나무다리에 질질 끌려오면 사실확인서 얼른 떼어주는 거여?
내 남편 관리 못해서 내 책임이라고 치고 제길 여관가서 어떤 년 구멍에 지 자지 집어 넣는 거 사진찍어 와야 간통이라메? 나 이십년 살아서 남는 건 지랄한다고 미친년이라고 그런 말 만 내 머리속에 잔뜩 들어 있으니께 나한테 이런 저런 요구는 하덜말아요?
그니께 나 이혼 할 수있어요? 없어요? 가부만 애기하면 그만이지 뭔 피해사실확인서여?
시발 좆같이 야! 정자야 가자?
상담원은 어벙벙하니 어쩔 도리없이 그 말들을 몽땅 들어 버렸다. 성질 급한 내 친구가 의자 밀고 일어나려니 맞은 허리가 결렸나 어이쿠 그냥 의자 아래 굴렀다.
목소리도 작지도 않아 바깥에 응접실에서 웅성 거린다.
소장인가 뭔가 들어온다.
내 친구는 또 뭐여? 이런식으로 쬐려본다. 난 얼결에 뒤로 제치고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소장이 밖에서 다아 들었단다. 맞는 애기란다. 이미 맞아서 몸이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데도 병원 진단이니 사고 확인서니 그런게 무슨 소용있겠냐고 그런다. 연세도 우리보다 연배가 있어 보였다.
친구가 그제야 운다. 내친구 울면 또 꺼이 꺼이다.
울면서 하는애기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같다.
녹차가 들어오고 다른 직원이 들어온다. 들고 있는 것이 사진기다. 요즘은 디카로 찍는단다.무슨 몽타쥬 찍는 것처럼 옆으로 정면으로 또 반대쪽으로.
몸에 멍이 있으면 얼른 들이대란다. 내 친구는 원피스를 아예 벗었다.
부라자에 팬티바람에 무슨 누드사진 모델같다.
허벅지에 허리에 가슴에 푸른 멍을 보니 아침에 본 선인장 가시가 생각난다.
얼마나 아팠을까.
푸르게 돋아 난 가시때문에.
옷을 주선 주섬 입고 소장이 그런다.
재판이혼을 하려면 진술서가 필요하단다.
사실 여기에서 작성해 줄 수 있지만 워낙 민감한 개인사생활인 만큼 본인이 구술을 하든.
글로 쓰던 그것이 재판이혼에 전부 적용이 된다고 한다.
친구가 나를 쳐다본다.
그건 걱정 말아요. 내 친구는 글쟁이예요. 내 애기 쓰라고 하면 아주 잘 쓸 거예요. 내가 그동안 겪은 것 다보고 다 알고 있어요. 없는 사실 쓰라고 하면 절대 안쓰는 애예요. 몇 장이면 되요?
소장은 안심된 눈치였다. 아까 그 무식한 욕을 하던 여자다. 또 이번에 웬 진술서냐고 따지고 물으면 다른 대책이 없다.
제한 없습니다. 대신 폭행당 할 때 병원 이용한 데 있으면 병원이름, 기억이 잘 안나도 그런 사실을 열거만 해도 되니 몇 장은 관계 없습니다.
잠시 상담실안이 조용하다. 나도 옆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소장이 또 묻는다. 혹시 핸드폰통화나 문자로 욕이나 언어폭력은 없었는지요?
없긴요? 그 인간이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맨 욕에 때리는 것에 범벅을 하죠? 그런데 왜요?
핸드폰을 달란다. 문자 온 것을 저장시켜 증거로 보관한단다.
수신된 문자에 이름이 여러개 있었다. 내 보기엔 신랑이름이 없다. 뭘 로 이름 새긴 겨?
보면 모르냐? 개 새끼! 개새끼라고 안 보이냐?
흐이구 열람을 하다보니 구구절절이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너 또 신고하면 니네 친정 불지르겠다... 그걸 일일히 인터넷 잭을 연결해 몽땅 저장 시키는데.
난 또 뒷목이 뻣뻣하다 못해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 날씨 좋은 오월에 내가 푸른 선인장 닮아가나...
내 친구는 당당하게 묻는다.
니! 내 진술서 써 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