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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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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이 같은 우리, 이제는...


BY 비상 2009-11-13

 

                   어제와 오늘이 같은 우리, 이제는...

 

 

바람이 쥐고 흔드는 창문의 울림이 광녀와 비슷한 수준이 됐을 때의 내 심장소리와도 같다. 덜컹덜컹...겨울로 치닫고 있는 계절을 알리기 위한 알람소리일까. 거세다.

‘이보시오! 겨울이오, 내가 왔소. 지닌 것 없는 사람 더 서글프게 하는 계절이 왔단 말이오. 지구온난화라 북극, 남극이 녹고 있다지만 난 겨울, 결코 만만한 놈이 니란 말이오.‘ 순간 바람의 아우성이 그리 들렸다.

간밤, 9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했던 남편의 혀가 역시나 오그라져있었다.

“여기 가게야. 견적서 좀 뽑아야 하는데 눈이 감기네. 좀 자다가 들어갈게.”

핸드폰이 아닌 발신자표시가 되지 않는 집 전화로 연락한 그의 말에 굳이 의문을 달고 싶지 않다. 냉기가 맴맴 도는 집구석보다 17년 내내 사업가로서 ‘사장님’소리 들으신 귀하신 몸은 10평 남짓한 사업장 쪽방에서 등짝이 뻘겋게 익을 만큼 가동시킨다는 기름보일러 온돌방에서 주무시겠다는데 굳이 의문을 품어봐야 혈압만 뻗힐 일, 이 몸뚱이로 중풍까지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그저 적당히 미치지 않을 정도로 날뛰고 오줌 싸지 않을 정도로만 지랄하며 살아갈 작정이다. 그동안 원치 않아도 닦아야만 했던 긴긴 날의 도(道)의 효력이리라. 술에 홀려 정신 빠진 행동일랑 나도 안보면 좋으니 가게 방에서 등짝이 늘러 붙도록 잠이나 쳐 자슈, 목청 높여 하고픈 말... 하지만 몇 시에 들어오건, 외박을 하던 연락 없는 내게 너무 관심 없는 것이 아니냐며 섭섭증을 떨던 사람에게 그동안 함께 살아온 정을 이유로 상투적이지만 관심 섞인 말을 건넸다.

“벌써 술 한 잔 펐네. 안주로 배 좀 채우고 마셨어? 견적서만 주구장창 뽑다가 과로로 쓰러질까 걱정이니 무리하지 마시고 푹 자. 어둔 밤 위험한데 굳이 들어 올 필요 없어.“

아내의 말에 결코 술을 마시지 않았다던 남편이 혀를 긴장시킨다. 그리곤 고집스레 집으로 귀가를 하시겠단다. 청개구리 120마리는 잡아 드셨을 양반에게 차마 뱉을 수 없던 말을 속으로 삭이며 전화를 끊었다. ‘니맘대로 하세요.’

몇 시쯤 잠이 들었던 것일까? 학원수업이 끝나 돌아온 딸이 숙제 때문에 밤11시가 가깝도록 불을 켜놓고 있었지만 무심한 엄마가 되어 어둠을 찾아 들어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늘 곁에서 지켜주며 챙겨주던 엄마의 평소와 다른 낯선 모습을 딸은 이해했을런지도 모를 검은 안개 속에 몸을 눕히고 있다가 겨우 잠든 밤이었건만...

어느 순간 밝은 불빛에 눈이 떠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식초 맛의 시큼함이 눈으로 느껴졌다. 띵하고 머리에서 신호음까지 옵션으로 들려왔다.  이쯤되면 코를 자극시키는 익숙을 넘어선 술내가 셋트로 따라온다. 이번엔 맥주다. 소맥 짬뽕은 그제 했으니 나름은 몸을 챙기며 마신 술이었나... 궁금하지 않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역시나 견적서는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  그의 술마시기 프로젝트가 나름은 지능적이라 자신할지 모르겠다. 냄새와 행동거지까지 어찌 좀 해보면 좋으려만.

“자.”

자는 가족들 생각은 않고 잠에 취한 강아지를 깨워서 넓지 않은 집안을 이리저리 헤매는 남편에게 녹음카세트 같은 입으로 말했다.

“아라써!”

남편의 입에서도 녹음카세트 같은 대답이 나왔다.

새벽 2시 30분, 나름대로 정한 규칙이 있는지 술 먹은 날의 귀가 시간이 보통은 그쯤이다. 5일 정도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본인은 한 달을 마시지 않았다며 자부심 찬 얼굴이다. 그땐 잠시 헷갈린다. 그가 알콜중독자인지 단기기억상실자인지.

2시간은 거뜬히 강아지를 상대로 떠들던지, 욕지거리 상대로 tv 스포츠방송의 애먼 선수들로 삼던지 목청 높이던 사람이 이제 힘이 딸리는가 1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곤 했다. 얼씨구절씨구 기화자가 아닐 수 없다.

두 달이 다되어 가는 것 같다. 백수 다 된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하긴 함께 살아왔던 그에게 일정한 날짜에 웬만큼의 돈을 받아 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100원 벌어오면 110원 가져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어찌 살아 올수 있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이 기적이라오~! 그러고 보면 또 내가 복은 많은 사람인가 보.’ 대답하고 말련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놨다간 손가락엔 디스크, 마음엔 하수구가 뚫리고 말테니. 궁상스런 구차한 삶, 사는 맛 제대로 느끼며 살아가련다.-

“나만 따라와요. 마음고생은 안 시킬 테니.”

아직도 귓가로 생생이 맴도는 그날의 간절했던 남편 말이 한동안 날 배신감에 떨게 했다. 남자의 말에 속은 여자가 나 하나만은 아닐 테니 어리석다고 자책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따져 묻고는 싶다. 마음고생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1년이면 행사처럼 한두 번 이불빨래 시키는 것이 그에겐 맘고생이 아닌 단련쯤으로 여겨지는가 보다. 때마다 생각 같아선 커다란 키 하나 주문 제작해서 머리에 쓰여 주고 밖으로 내보내 굵은 소금이라도 얻어오게 하고프다. 그렇게 모인 소금으로 좀체 실력이 늘지 않아 가망 없는 김치라도 담아보게. 마누라의 어떠한 말에도 만능키처럼 쓰이는 ‘아라써’라는 상투적인 대답뿐 여전히 변함없는 행동을 일삼으며 때때로 신경질 테스트를 해대는 남편을 한 달만 거꾸로 매달아놓고 물만 먹이고 싶다.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패주고 싶은 남자에게 해줄 말은 많건만 강아지 귀에 애국가 읊기란 것을 알아버렸다. 그의 귀를 열방법이 없다. 귀머거리라서 그렇다면 수화라도 배울 텐데... 절망이 그림자처럼 들던 어느 순간부터 뇌리로 떠오르는 때가 많아진 단어. <제기랄~!>

“비가 오나보네?”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남편의 오늘, 실컷 자고 일어나서 안방을 벗어난 사람이 헐렁한 빤스차림으로 마누라의 눈을 괴롭히며 어슬렁거린 시간이 오전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덜컹거리는 창문으로 다가가서 빼꼼이 열더니 밖으로 잠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거둬들인 시선으로 굵은 지렁이 한 마리가 깊이 이마에 새겨졌을 마누라의 낯빛으로 향했다. 그리곤 이내 쪼르륵 달려와서 거친 두 손으로 폭삭 삭아버린 마누라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그리곤 수염이 까칠한 얼굴과 아직 가시지 않은 술내 나는 입술을 들이댔다.

“사랑해, 뽀뽀...”

그 순간 내가 꽃다운 아가씨였거나 아니면 그가 외간남자였기를, 하는 간절한 아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렇다면 정당하게 강펀치 주먹을 정확히 낯바닥으로 날렸을 테다. 그리곤 저만치 나가떨어져서 혀를 길게 빼내고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쉬고 앉아 있는 그를 볼 수 있을 테지. 생각만으로도 통쾌한 그림이다.

술에 빠져 어려움을 회피하려는 남편의 곁에서 아내는 점점 아동틱한 공상만화 속으로 빠져들 때가 많아졌다. 하지만 현실의 아내는 그저,

“야~!!!”

목청을 높여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3군데 미팅이 있는 관계로 아침 일찍 나가야 한다던 사장님은 그때서야 불에 댄 듯 흠칫 놀라더니 대충 닦고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쏟아낸 눈물의 양이 바다와 같건만 아직도 넘치는지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더 이상 억울해 하지 말자 했건만...

<어려움 앞에 늘 움츠리고 술로써 숨어버리면 다치는 건 늘 가족이야. 힘들어? 그런 가장만난 우린 비참해.>

남편이 가장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도 잔소리를 놓을 수는 없었다. 난 평강공주 마누라, 바보온달 남편을 훌륭하게 만들겠다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국사람인양 말길을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거대한 양의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보다 간략하지만 핵심 같은 자극을 심어줘야 했다. 남편이 나간 30분 동안을 핸드폰을 붙잡고 여러번 고쳐 쓰고 겨우 보낸 문자였다. 그리고 몇 분이 흘렀을까. 핸드폰의 진동이 일었다. 남편에게서 온 문자다.

<아빈엄마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