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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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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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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안에 가시


BY 플러스 2010-09-16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자신의 종을 가난하게 방치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하나님에 대하여, 또 아버지와 교회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성장했다고 합니다.

 

청년이 되어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신학교에 진학했지만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그는,

어느 날 교수님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겨둔 채 학교를 떠났다고 합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교문을 나선 후, 오히려 세상의 기쁨을 맛보며 성공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답니다. 

결혼도 하고 사랑하는 두 딸도 얻고그리고 미국의 한 기관으로부터 교수 제의를 받기에 이릅니다.

그의 나이 서른 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출국하기 며칠 전, 갑자기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실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가족간의 갈등은 깊어졌고,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도 버림받게 된 채

한없는 외로움과 절망, 좌절 속에 있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그는, 이후 30 여 년간

시각 장애인들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교회의 인터넷 사이트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지난 주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가끔씩 꺼내어 쓰는 곡물가루 갠 것이 좀 남았길래 어찌할까 하다가, 이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이므로 잘 두었다가 저녁에 써야겠다고 여기며 욕실을 나올 무렵이었습니다.

 

물기를 닦아내고 있을 즈음에는 설교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음으로 한 인생이 얼마나 위대하게 변화될 수 있는 지 놀랍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손으로 치유되고 회복되고 승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있는 내게는, 그것과는 다른 생각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가 아무리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캄캄한 몇 십 년의 인생이라니 

  저 분은 그것이 마치 축복이기라도 한듯 이야기하고 있구나.. 

 

  주님을 알게 되고 그 자녀가 되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기로

  그것이 귀중한 눈을 앗으시는 대신 얻게 하시는 것이었다면

  그 어찌 잔인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득 나의 생각을 모두 읽으시는 주님을 의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화 속의 한 사람에 대하여 하신 일이 잔인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돌이킬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늘 그렇듯 그냥 그렇게 생각이 지나갔을 뿐이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날을 살았더랬습니다.

 

밤이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시 욕실에 들어갔습니다.   

 

아침에 남겨둔 곡물가루도 잊지 않고 알뜰하게 다 사용하고 나오려는데 

세면대 앞을 지나려는 순간 갑자기 찬물로 얼굴을 한 번 더 헹궈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을 구부려  수도꼭지에서 콸콸 나오는 찬물을 두 손으로 가득 받은 채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내 입에서 !” 하는 짧은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이

 

고개를 들어 바라 본 거울 속의 내 오른쪽 눈 안쪽 흰자위부분에  무엇엔가 깊이 찔린 듯 피가 맺힌 것이 보였습니다커다란 점 두 개를 이어놓은 것 같은 형상으로 맺힌 핏자국이었습니다.

 

아침의 일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걱정보다는 놀람과 무언가 억울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더욱 잉잉울어보려 했지만,

눈물은 마치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찬물로 여러 번 헹구어내어도 눈 안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 눈을 찌른 것이 빠져나오기는 한 것일까 염려하며 욕실을 나섰습니다. 

그 밤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가족들 말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려 보려고 계속 애쓰다가 

주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단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지만 잠들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건조하여 빡빡하기만 한 눈은 눈꺼풀을 열고 닫기에도 껄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아직 조용하기 그지 없는 거실 소파에 혼자 누워 있으려니 이제는 정말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젯밤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던 기도를 다시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 인터넷을 통해 들려왔던 이야기 속의 한 남자에게 주님이 하신 일을 잔인하다, 

또 한 편으로는 부당하다고도 여겼던 것도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케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무시무시한 말씀은 죄를 짓지 말고 살라는 것을 강조하여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라고

편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가곤 했을 뿐인데,

어쩌면 그 말씀은 말씀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생 또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은,

일견  잔인한 것처럼 들리는 성경 속의  비유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잃어버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하여, 그렇게 비유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너무나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받아들임' 또는 '수긍'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이야기 속의 남자 또한 눈은 잃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어쩌면 영광스럽게도 그 귀한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그 길로 이끄는 일에 참여하게 된  '축복받은 사람'인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나를 이렇게라도 가르쳐 이끌고자 하신 주님께로 마음이 집중하듯 향하며

그렇게 흘려보려고 애를 써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쬐끔 흘러나와 눈 안쪽을 촉촉하게 적셨습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난 나는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끼며 오른쪽 눈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검지 손가락에 아주 얇고 가느다란 가시 하나가 붙어 있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그것은, 내 눈썹보다도 가늘지만 야물고 빳빳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곤충의 일부를 보는 것같은 느낌이 들만큼 쌩쌩해보였지만,

그 색깔은 곡물가루와도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어디에서 비롯된 가시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려고 얼굴을 드는 순간 

그것은 마치 바람에라도 날리듯 가볍게 아래 쪽 어딘가로 툭 사라져버렸습니다. 

가시와 함께 눈 안에 자리잡고 있던 고통도 빡빡함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창문 가득 들어오는 아침햇살처럼  환한 기쁨만이 내 마음 속으로 번져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덧붙이는 말) 이야기 속의 목사님은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실제 주인공인 분이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