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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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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날


BY 플러스 2010-01-10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을 향해 가고 있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출장 준비로 바쁜 남편을 보고 있던 중 머릿속에 여권이라고 떠올랐을 때에 한 번 물어보았어야 헸습니다.  영양제를 어디에 넣어서 주어야 할까 궁리하던 중이라 넘어가고 만 것이,  몇 십 분 후에  택시를  타러 부랴부랴 뛰쳐 나오게 한 것이었습니다.

 

대로를 향해 달려가는 중에  길 건너 편 이면도로 쪽에서 택시가 한 대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느 새 바뀐 신호등을 따라 이면도로를 빠져 나온 택시가  빈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로 내려선 내 앞에 정차했습니다.

 

내가 언제냐… 00년도에 저기 르네상스호텔에서 공항까지 30분 만에 간 적이 있어요..”

 

숨이 차서 헐떡이는 내게 아저씨가 즐겁기까지 해 보이는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라디오를 끄고 녹음테이프 플레이 버튼을 누르더니 엑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음악이 귀에 익숙하다 싶었습니다....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주제가였습니다.

 

신호등의 신호를 어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절묘하게 신호를 조금씩 앞서가며 빠르게 교차로들을 통과해가는 아저씨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 영화 속 주인공인 노련한 총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늦지 않을까 하는 염려 속에서도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신경써야 할 일들로 정신없이 바빴던 근래의 남편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되며 한 편으로는 안쓰러움이 떠나지 않는 채로 바깥 풍경들을 내다 보고 있자니....  어느 새  탁 트인 한강과 그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어붙은 강가와 얼마 전의 폭설이 채 녹지 않은 채 어젯밤 내린 눈이 덧쌓인 주변의 풍광들이 주일 아침의 한적함 속에서 더 여유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3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의 집과 친정을 오가며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았던 한강의 아름다운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으며,  한강이 그처럼 아름다왔던 것을 서울에서만 살았을 때에는 알지 못했었음을 문득 깨달았던 기억도 다시 떠올랐습니다.

 

서해를 향해 강의 하류쪽으로 내려갈수록 주변은 더욱 시야가 넓어지며 지평선까지 눈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 편 왼쪽으로 보이는 설산과  눈옷을 두텁게 입은 나무들도 회색 하늘 아래로 빼곡하게 늘어서있었습니다. 사방이 눈인... 고요한 겨울 풍경이었습니다.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말발굽 소리가 따가닥 따가닥 들려오기도 하는 또 다른  음악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여전히 운전 솜씨를 과시하듯 유연하게 차들을 젖히며 달리는 아저씨의 모습은 바깥 풍경들처럼 여유로와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음악 속 말발굽 소리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타며 달리고 있는 것 처럼도 느껴졌습니다. ^^

 

그런 아저씨를 보며 또 잠시 웃음짓고 있자니  며칠 전,  관측이래로 가장 많은 눈이 서울에 내렸다던 날  눈으로 뒤덮힌 거리에서 본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의 학교에 서류를 떼러 갈 일이 있어서 길을 나서야 했던 그 날, 거리는 이미 내린 많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눈을 맞으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거리에서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라이브로 들리는 소리인 것은 같은데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쉽게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차량이 끊어진 채 드문 드문 한 두 대가 엉금엉금 지나갈 뿐인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걷는 걸음과 함께 색소폰 소리도 점점 가깝게 들려왔습니다.  교차로에 도착하여 신호등 앞에 선 채로 안경을 꺼내었습니다.  그 근방에 소리의 근원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인도와  도로를 구분할 수 없이 눈으로 뒤덮힌 교차로는 전체가 너른 광장처럼 보였고,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지른  곳, 상가 건물 앞에  한 남자가 색소폰을 불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구불구불 파마머리에 검은 선글래스를 끼고 검은 색 긴 외투를 입은 채 음악을 따라 이리 저리 몸이 흔들리며 열정적으로 연주를 하고 있는 그는... 그가 선 뒷편 상가건물의 4층에 있는 재즈음악학원의 원장선생님이었습니다.  언젠가 조금 인색한 사람인 것 같다고 느꼈던 생각은 그 순간 사라져버리고,  그 엉뚱하고 유쾌하기까지 한 모습에 후한 점수를 주며  마냥 즐거워만 지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도 어린 시절에나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큰 눈이 내린 그 날.. 60을 훌쩍 넘긴  점잖은 원장선생님도 밖으로 나와 눈을 맞으며.. 눈 속에서 음악을 연주하고픈 욕구를 억제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교차로를 지나 뒷 편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걸어가자니 거리의 이편 저편에서 미끄럼질을 치며 지나가는 청년들이 보였습니다.  폭설이 가져다 줄 불편함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눈으로 뒤덮힌 세상 속에 들어서서  잠시 동심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 어른들이 꽤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멀뚱멀뚱한 얼굴로 표정없이 연주자를 바라보던 사람들 속에  짖궂은 청년들도 몇 명 섞여 있었던 것인지 음악이 끝나고 나자  앵콜을 외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들려왔습니다.  아이들같은 장난스러움이 담겨진 채 들려왔습니다.

 

예기치 않은 큰눈이 가져다 준,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복잡한 거리에서 그 날 볼 수 있었던 한적하고 낭만적인 광경은 흡사 유럽의 어느 광장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향해 걸으면서 문득,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그런 작은 특이한 일쯤은,   혹 누군가에게는 정신나간 짓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이 곳 저 곳에서 보고도 싶고,  또 해 보고도 싶다는 생각이 들던,  기록적인 폭설이 가져다 준 특이한 날’의 기억이었습니다.

 

 인천 공항까지 택시비는 상당히 나왔지만,  오랫만에 여유로운 드라이브를 즐기게 해 준 남편과 공항에서 만났습니다. 

 

먼 길 여권들고 달려와 준 아내가 고마워서인 것인지,  서양인들이 여럿 보이는..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인 것인지..   평상시라면 사람들 앞에서는 하지 못할 애정표현을 마구 하던 남편으로 인해  공항에서의 헤어짐이 쉽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도...  아직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도 하지 않았을 텐데 남편이 보고 싶어져서 벌써 마음이 약해져 버리니..  일 주일이 어여 지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