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텔레비전 채널을 이 곳 저 곳 지나다가, 한 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 직업이었던 개그맨이었는데, 그가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래전 ‘개그맨’으로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나이든 모습은 그는, 세계 속에 자리잡고 싶은 ‘세계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은 집념과 자신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다가 어느 순간 ‘아리랑’ 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내게도, ‘아리랑’과 관련한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 봄, 꽃잔치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Keukenhof 한 쪽 코너에 따로 마련된 일본식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원 안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음악이 문득 귀에 들어왔습니다. ‘아리랑’이었습니다.
일본식 정원이라고는 써 있었지만, 같은 동양이라고 여겨 우리나라의 민요가 흐르나보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곧 스피커에서 ‘지금 들은 음악은 일본의 유명한 전통음악’이라는 설명이 영어로 덧붙여지는 것이 들렸습니다.
밤새도록 관광버스를 타고 온 피곤함도 잊고, 방송실을 찾으려고 주변을 찾아 다녔습니다. 우리의 귀한 유산이기도 한 ‘전통음악 아리랑’이 우리 것임을 알려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바로 잡고 싶었습니다.
Keukenhof에서도 구석에 위치한 일본식 정원 주변에 방송실처럼 보이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일렬로 심겨져 있어 마치 색색의 띠처럼 보이던 들판이 지평선 끝까지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내게 들던 막막함과 아릿한 오기…. 그것이 타국에 있던 때의 내가 아리랑과 관련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습니다.
SF류나 판타지물은 시리즈로 dvd를 모을 정도로 좋아하는 아이들이기도 한지라, 그 개그맨이자 영화감독이 만들었다는 판타지 영화 또한 예약을 해 두었었습니다. .
영화를 보게 될 날인 오늘 보다 하루 전이었던 어제, 다시 채널을 스쳐가던 중 그 개그맨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번에는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저는요, 평가 받고 싶지도 않아요” 라고 말한 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속상한 만큼 펑펑 울고라도 싶은 아이 같아 보였습니다. 아마, 인터넷과 방송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두고 회자되던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에 심적으로 많이 시달렸던 모양이었습니다.
광복절인 오늘, 아이들과 영화관에 앉아 보기 시작한 영화 ‘디워’는 김홍도의 그림 등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의 전통미를 느끼게 할 그림들이 묵향을 풍기듯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화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자연스럽지 못한 장면들,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상상할 만큼을 뛰어넘는 심한 비약, 동양과 서양의 극단적인 충돌을 느끼게 할 만큼 제대로 섞이지 못한 채 진행되는 스토리, 화면들. 때때로 보이는 외국의 다른 판타지물을 옮겨 놓은 듯한 부분들.
분명히 보이는 서툼과 어색함 속에서도, 영화관의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함성같은 웃음은 즐거움 그 자체였습니다.
남편과 이런 저런 평을 자그마하게 주고받던 나는 이제 등을 의자 깊숙이 기댄 채, 차라리 영화 속의 어색함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개그맨이었던 그가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유머가 배우들의 대화 속에서, 또 몇몇 장면들 속에서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헐리우드적인 상업성을 충분히 고려한 장면들이나 구성 또한 적절하게 배치된 것도 보였습니다.
그 중에는 여성인 나의 시각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극단의 최소성이라고 할 만한 예술성이라고 억지로라도 봐줄 만한 선정성에도 미치지 못할 장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질을 낮춘 장면들..
대단원을 이루는 마지막 장면의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져 버리는 ‘악의 군단’ 장면과 함께 가장 워스트한 부분으로 꼽을만한 것이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적당한 상업성과 스펙타클한 면모를 갖추어 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스토리 자체와 상관없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면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것 중 하나가 악한 이무기가 자신이 용이 될 수 있게 해 줄 ‘여의주’를 탈취하려고 결사적으로 덤벼들던 모습입니다.
거대한 힘과 능력을 가졌지만 결코 스스로 용이 될 수는 없는 자신을 ‘용’이라는 존재가 되게 해 줄 수 있을, 연약하여 자신을 제대로 보호할 수 조차 없는 여자로 변해 있는 여의주를 어떻게든 취하고자 목숨을 걸고 포효하며 절구하던 모습, 그 안에서 보이던 ‘슬프도록 굶주린 갈망’이었습니다.
그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또 다른 이무기인 선한 이무기와 벌이던 피비린내나는 처절한 싸움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무기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신성함 마저 가진 신비한 존재로서의 ‘용’이 되고 싶은, 각각 악의 편과 선의 편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이무기. 회색 구름을 열어 젖히듯 하며 쏟아지는 파란 하늘. 그 속으로 찬란하게 승천하려는 욕망. 그것은 그들의 영원한 꿈이요,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이무기의 꿈만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의 꿈이요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꽁꽁 묻힌, 한스러울 만큼 간절하고 찬란한 꿈인지도 몰랐습니다.
영화 ‘디워’를 CG외에는 볼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 ‘꿈’을 찾고 실현하고 싶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 캐어내지 못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연극이든, 연주든, 하다못해 대중적 상업성을 가장 큰 자산으로 여길 영화라도, 그 안에는 인간이 인간을 향해 다가가는 가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것은 탄탄한 스토리나 예술성 만큼이나, 때로는 그것 보다도 더욱 큰 힘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영화 내내 때로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또 때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며 또 때로는 비판을 담은 말을 남편과 주고 받기도 했으면서도, 승천하는 용을 담은 커다란 하늘과 그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남자를 두고 흐르는 ‘아리랑’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것일 겁니다.
자기희생을 통해 주인공인 남자와의 사랑이 아닌 다른 차원의 사랑을 보여준 여의주, 그리고 그 여의주를 물고 이무기의 껍질을 벗어 던진채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되어 주인공인 남자의 주변들 돌며 눈물을 흘리고는 자신의 길로,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용. 그리고 다음 생의 인연과 사랑을 약속하며 떠난 여의주가 용과 함께 사라진 하늘을 응시하고 서 있던 남자.
그 한국적인 사랑의 승화 장면 속에 ‘아리랑’ 보다 더 잘 어울릴 만한 음악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애국적 정서를 자극할 만한 음악으로 아리랑을 삽입한 거라고 비판하지만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게 끝나는 것을 보면서, 내게 개그맨이 아닌 영화 감독 심형래를 향해 박수 쳐주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크린 위로 영화를 만든 사람으로서의 고백 같은 글들이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감독 심형래’라는 글자가 뜨자, 나는 박수치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앉은 여자가 나를 힐끗 쳐다 보았지만 나는 그 박수를 금세 끝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박수 소리에 다른 박수 소리들이 합쳐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