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한 아이였다는데....... 그런데 가끔씩 나 자신 속에 생성된 반발심이 이제는 밖으로, 때로는 과감하게 표출되기까지 한다는 것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딸 아이와 친구처럼 둘이서만 분식집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사방이 어스름한 저녁이었던 그 시각 우리의 서너 걸음 앞서서 깡마르고 키가 큰 한 여자가 우리 라인의 아파트로 들어섰습니다. 그녀를 보자 경비 아저씨가 경비실 의자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허리를 기역자로 굽혀 인사를 올렸습니다.
아저씨는 그렇게 일어서신 채로 뒤따라 들어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주치면 보통은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므로 일어서신 김에 우리와도 인사를 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딸 아이에게 들고 있던 낱개로 포장된 쿠키를 아저씨께 몇 개 드리겠느냐고 이야기하던 중이었던 나는, 갑자기 그런 행동이 너무 유치한 것 같다는 생각에 쑥스러워져 아저씨쪽을 쳐다보지 않고 재빨리 현관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유치한 행동을 했더라면 마주치지 않아도 될 일이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모른채...
어느 새 앞서 가던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우리와는 상관없이 닫힘 버튼을 누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50대 쯤으로 보이는 여자의 날카로운 두 눈이 비스듬히 내려다 보는 것이 닫히는 문 사이로 보였습니다. 딱딱하고 무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웃인데도 배려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다음 번에 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경우는 한 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니 이제는 무심하게 지나는 일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닫혔는가 싶었던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기다리고 선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뛰다시피 엘리베이터에 올랐습니다. 행동이 엄마 보다는 느린 편인 딸도 뒤를 이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그녀가 호통을 쳤습니다.
빨리 뛰든지 해야 할 거 아냐!!!!
미움과 독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작은 공간을 날카롭게 쩌렁쩌렁 꿰뚫었습니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었을 뿐 그 안에 담긴 힘과 기세는 그 자체로써 폭력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고, 다음 순간 분노가 반사적으로 솟구치며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겨우 간발의 차이로 그 분노를 누른 채, 그녀의 얼굴 한 번 바라보지 않은 채로 재빠르게 열림 버튼을 누르고,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습니다.
그녀 혼자서 편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우리는 층계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10층까지.
그런 사람을 향해 똑같이 응대하지 않고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막힘이란… 생판 초면인 이웃에 대하여 자신이 내어 준 2, 3초가 그처럼 아깝고 분노스러웠던 것인 지, 할 말을 잃었을 뿐 아니라 감히 나도 어른인데 딸 아이 앞에서 애취급을 하며 호통을 치던 이웃인 여자에 대한 분노감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한 시간 쯤 후, 마음을 식히려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cctv를 통해 다 지켜보셨던 것인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가 경비실 유리창을 통해 보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눈에 뜨이자 아저씨가 얼른 경비실 문을 열고 나와서는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들어가지 않고 배웅하듯 서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호통이 아니라 거의 분노를 쏟아낸 여자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없습니다. 혹, 어딘가에서 자존심이 심하게 상하는 일을 겪었다가 경비 아저씨의 깍듯한 대우 속에서 그 일이 더 상처가 되어 터져 나왔던 것인 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감히 어른인 내게, 아무리 나이가 더 많다고 해도 같은 어른인 입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막 대할 수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에 불쾌함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확대되어, 낡았지만 싯가로는 상당한 고가의 집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이면 그 정도로 함부로 굴어도 되고, 또 공동 엘리베이터 정도는 자신의 것처럼 여긴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잠시 생각해보면, 그녀는 눈이 좀 많이 나빴던 모양입니다. 그 며칠 전, 동네 서점에서 딸아이용 중학교 참고서를 고르려는 내게, 고등학교 참고서를 찾느냐고 묻던 나이 많던 아저씨 만큼 말이지요. 더군다나 어둑한 저녁이었으니, 그녀의 눈에 나는 딸과 정말 친구 쯤 되는 아이로 보였던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혹 아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행동은 결코 좋게 봐 줄 수 없는 것이긴 합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급하게 올라탄 사람에게 그렇게 욕을 하듯 호통을 치다니 말이지요.
그녀의 어이없는 공격성이 준 상처는 그 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내게 조금은 남았던 모양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반발심으로, 나 또한 어른일 뿐 아니라 공격적이어 보일 수도 있다는 반발심을 외적으로 표현하려는 심리로 나타났으니까요.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