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심하게 실연을 당하거나 한 거는 아니었니? "
태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
영선이 쏟아지던 질문들을 가라앉힌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영선과 태영, 그리고 다른 동기들 사이에 깊은 침묵이 지나갔다.
태영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 현성이가 요즘 술을 무지 마셔. "
갑자기 끼어든 현성의 이야기에 놀란 듯 영선이 태영을 바라보았다.
" 현성이가 날마다 완전히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 "
현성이라면, 착하고 성실하며, 훤칠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순박한 데가 있는 남자 동기였다. 그런 현성에게 태영이 말하는 술취한 모습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태영이가 영선과 다른 동기들이 듣고 있음을 새삼 의식이라도 하듯 피식 웃음을 내 보내며 다음 말을 덧붙였다.
" 얘가 술먹고는 자꾸 울잖아. "
" 기집애처럼.. "
태영이 한 번 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태영의 현성을 향한 염려의 마음이 물기로 슬쩍 묻어나왔다.
"흠.. "
태영이 시치미를 떼려는 사람처럼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침착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 도서관에... 죽기 며칠 전에 정인이가 현성이를 도서관으로 찾아왔더래. 누군가랑 얘기를 좀 하고 싶다고 그러더래. 그런데... 그 즈음 얘가 밀린 레포트때문에 좀 바빴잖아. "
태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 그 날, 정인이 얘기하자는 걸 들어만 줬더라도..... 그렇게까지 되는 것은 막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거지. "
태영이 다시 말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오랫동안...
울컥하려는 마음이 가라앉았는 지 태영이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 현성이가 자책을 많이 해. "
"유서에 그런 부분이 있었대. 죽기 전에 현성이를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정인이가 현성일 좋아했던 모양이야"
" 그걸 보고, 정인이 언니가 수첩에서 전화번호를 찾아서 연락을 해 왔던 거야. '
" 장례식에도 갔었대. 화장해서 가루를 강물에 뿌렸다는군. "
" 이 자식이 어제서야 사실을 실토했잖아. "
잠시 침묵하던 태영이 남자아이들의 과격한 장난말로 가장하듯 과장된 어조로 마지막 말을 덧붙이고는, 꺼내기 어려운 말을, 그러나 해주었어야 했을 말을 다 마치고 이제야 짐을 내려놓았다는 듯, 영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슬쩍, 힘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