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가죽 소파 뒤 쪽으로 영선이 몸을 깊게 기댔다. 조용한 공간이 그녀의 시야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그 공간 속으로 둔 그녀의 눈이 깊어졌다.
'인간에게서 갖가지 사회적인 옷들, 문화적인 옷들, 체면을 가장한 거짓들을 하나하나 벗겨내면 무엇이 남을까.'
순간, 인간의 알몸은 너무나 평범한 것이기에 그림의 소재로 싫어했다던 유럽 귀족들의 취향을 설명하던 책 속의 구절을 농담이라도 하듯 떠올리며 영선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꾸밈이라는 것, 값비싼 장식이 없다면 귀족인지 천민인지 잘 알아 볼 수가 없었을테니...'
영선의 눈이 다시 깊어졌다.
'우리에게서 진실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낸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생존 자체를 위한 본능들,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얄팍한 쾌락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버리지 못한 채, 그 알몸에 걸치고 있는 조각조각난 숱한 누더기 조각들 ? '
영선의 생각은 다시 어두운 방향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물...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생명체와 그리 다를 바 없음? 추악함? '
'그런 인간들이 갖가지 이기적인 욕구 속에서 얽히고 섥켜서 살아가는 사회는 ? '
추. 악. 함.
영선의 내면 속에서 들리는 듯 하던 목소리가 잠잠히 잦아들며 뱅뱅 돌더니, 이윽고는 마침표라도 찍듯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한 아이의 마지막 말이 그 정적의 꼬리를 붙잡고 한 가닥 확연한 선율처럼 올라온 것은.
' 세상은 너무나 추악해.
이런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해마다 그리고 날마다 나 자신 또한 더러워져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야.
조금이라도 순수함이 내게 남아 있을 때 떠나고 싶어. '
그것이 그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추악함', 순수함'. 그 두 가지의 단어가 종이 앞 뒷면처럼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도는 듯 했다. 그 떠나지 않는 말들 속에서 영선에게 그 아이, 정인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동아리에서는 산행 계획을 하나 잡고, 회원들 전부가 참여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었던 영선에게 경기도 북부의 어느 지역에 있다는 산으로의 산행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잡아 끈 것은 과친구이기도 한 진이였다.
"난 너 안가면 안 갈거란 말이야. 알았지? 가자. 가자. 꼭 같이 가자."
막내의 성격이 말투나 얼굴 모습에까지 다 드러나곤 하던 진이는 그녀를 그렇게 잡아 끌었었다. 그러나 며칠을 두고 조르는 진이를 따라 나서기로 했던 영선이 산행하는 날 아침 상봉터미널에서 만난 것은 진이가 아니라 정인이었다. 또 새벽바람에 마음이 달라진 게 틀림없었다.
'먼 길'을 친구 없이 가게 된 영선은 정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것은 영선에게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동아리방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은 정인은 영선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준 것은 아니었다.
단정한 고등학생처럼 이마를 덮은 채 눈썹 바로 위로 일자로 잘려진 머리는, 옆도 뒷목선도 덮는 법이 없이 짧고 언제나 깔끔했으며, 웃는 법 또한 없는 그녀의 얼굴은 날카롭고 쌀쌀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코 미운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얼굴 어느 곳에서도 부드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국문학과 2학년이라고 했다.
서울을 벗어나 점점 초록이 몰려드는 버스 창으로 비치는 정인의 얼굴 그림자를 가끔씩 보면서도 영선은 말을 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깊게 입을 다문 채, 바깥 경치만 바라보는 그녀에게서는 어떤 감정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