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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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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BY 모퉁이 2005-09-29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 3번 출구 남산골 한옥마을 11시.

적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확인해 가며 4호선 3번 출구로 나왔다.

매일경제신문사 사잇길로 200미터를 외운게 잘못이었나.적을 걸..

그 사잇길을 찾느라고 앞만 보고 걷다보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길가는 아저씨께 한옥마을을 물었다.모른단다.다른 아주머니께 물었더니

꺽어진 길로 가란다.오호~기와담이 보이는 걸 보니 저긴가 보다.

기와지붕을 한 [한국의 집]이란 간판을 보고는 안내원인 듯한

아저씨께 목으로 까딱 인사를 하고는 누가 오라고 한 곳 처럼 들어갔다.

이상하다.몇 년 전에 서울투어를 하면서 다녀갔던 한옥마을이 아니다.

문 앞에 아저씨께 물었다.백일장 하는 곳이 어디냐고..

한 편의 코미디를 본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옆집(?)으로 가란다.

그 곳은 유명한 한정식집인 듯했다.

나중에 그 아저씨를 만날 일도 없겠지만 뒤꼭지가 뜨끈하고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원,, 실없는 짓은 다 하고 다닌다.

 

유치원 꼬마들의 소풍 나들이가 많았고,관광객에 백일장 참가자로

한옥마을 마당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제는 제16회 서울시 여성백일장이 열린 날이다.

구(區)백일장에서 입상한 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모임이 하나 있는데

우연찮게 입선하게 된 나와는 달리 기성작가 못지 않은 글솜씨를

가지고 있어서  크고 작은 백일장에 참여하면서 상금도 받고

 문예원 활동을 하는 이가 이번 백일장에 모두 참여해보자고 하여

모처럼 야외 나들이 하는셈 치고 참가하게 되었다.

구 백일장과 달리 시 백일장은 일단 규모가 커서 상금도 단위가 높았다.

 

염불에도 잿밥에도 침 삼킬 형편이 아니어서 글제를 받아놓고도

한 시간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제공할 줄 알았던 점심도 나오지 않아 밥도 굶었고

나눠줄 줄 알았던 돗자리도 빌려준다 해서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이미 제출한 사람들은 마침 공짜로 나눠주는 피자를 한조각 얻어먹기도 했고

초안이 잡힌 사람들은 원고지에 옮겨적기를 하고 있는데도

나는 글제도 정하지 못하고 머리 속은 하얗게 백지가 되어 버렸다.

비무장지대,새물맞이,가족,인연,여행,산

주어진 제목은 많은데 어느 것 하나 저거다'싶은 주제를 잡지 못했다.

두 시까지 원고를 제출하라는데 시간은 어느새 1시가 넘었다.

[여행]이란 제목을 적어놓고 또 멍하게 있다가 무슨 배짱인지

바로 원고지에 적었다.무슨 말을 썼는지 어떻게 썼는지 내용을

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어차피 참가에 의미를 두고저 했기에 큰 아쉬움은 없다.

 

나눠준 원고지 10장 중에 나는 겨우 8장을 채웠는데

엎드려 열심히 적고 있던 회장님은 원고지가 모자라 빌려서 써냈다.

1시 30분이 되자 끝내기 프로그램으로 트럼펫 연주가 있었다.

미리 끝낸 사람들에게는 파란하늘 아래서 추억의 음악을 듣는

좋은 시간이었을테지만 마무리 원고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방해였다고 옆 자리 아줌마들이 궁시렁 대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 아직은 따가웠다.

그늘이 마땅치 않아 키작은 나무 밑의 조각 그늘은

겨우 몸 하나 숨기기 급할 정도였다.

양산을 챙겨온 이들의 준비성이 부러웠다.

챙있는 모자를 챙겨온 이들 역시 경험자들 같으다.

아무 준비도 없는 나는 역시 초짜 표시가 난다.

 

준비된 음악도 끝나고 마감 시간이 되자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일어나는 사람들로 나무 밑도 조용해졌고

널부러진 돗자리는 햇살에 반사된 은빛으로 눈이 부셨다.

빌려준다는 돗자리는 원래 나눠줄 양이었는데

몇 개월 후에 치뤄질 선거법에(무슨 선거인지 관심이 없어서리.)

 저촉된다는 이유로 취소되었지만 원한다면 굳이 말리지 않는다길래

나와 회장님은 돗자리 하나씩 얻어서 어깨에 메고

야외 나들이 다녀오는 사람 흉내를 내었다.

별 거 아닌 것에서도 아줌마 근성을 나타내니 어쩌면 좋으노.

염불은 못 챙기겠지만 흘려놓은 잿밥은 챙긴 셈으로 치자.

 

하루나 이틀 시간 내어 집을 떠난 여행도 나른한 일상의 탈출구가 되겠지만

한 나절 비운 짧은  시간에서도 여유를 부려보는 기회는 더러 있을 것이다.

하루 해에 다녀올 수 있는 야무진 일탈의 계획을 이 계절 중간 쯤에

한 번 더 잡아봐야겠다.

내 수첩 속에 가을잎 몇 장 담아 올 수 있는 그런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