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다닌답시고
세탁기 안에 옥시크린 세제를 털어 넣는 것으로
은근슬쩍 건너뛰었던 삶는 속옷 빨래들을
모처럼 폭폭 삶아 뽀얀 햇살에 내건다.
휴일을 지나는 하늘은
구름마저도 한껏 여유를 거니는 듯
저만치 게으른 뭉게구름이 빛살을 걸러내고 있다.
여름내 습기 찬 아랫도리를
햇살에 뽀송뽀송 말리는 하반신들의 속살거림이
그리 숭하지 않은 걸 보니 나도 이제
부끄러움의 경계를 넘어서는 나이에 접어들었나 보다
손 차양을 하고 있었어도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햇살이 따사롭다.
그래, 오늘 같이 여문 햇살이 꾸준히 지속돼야
벼 나락이 단단히 여물텐데...
'가을 햇살 하루면 곳간의 양식이 틀려진다'고
어렸을 적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만큼 일조량이 열매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말일 테다.
새벽부터 서둘러 해 널었던 빨래는
정오를 마악 지났음에도 이미 까실까실 잘 말라있다.
세탁기에서 건조대 자리 나기만을 기다리는 젖은 빨래감이 생각나
빨래를 걷다 문득 길다란 바지랑대를 걸친 유년의 빨랫줄을 당긴다.
마당가 한쪽,
넓적한 돌멩이가 박힌 우물가에서
오후의 쨍쨍한 햇살을 빨래 방망이로 탕탕 내리치던 엄마.
세탁기가 없던 시절
여섯 식구의, 큰 대야 가득 삶은 빨래며 땀내 나는 겉옷들을
하얀 머릿수건 두르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던 엄마의 뜨겁던 등.
마당을 길게 가로지른 빨랫줄엔
중간에 튼튼하고 길다란 바지랑대를 받쳐 놓고
밀린 이불홑청이며, 장맛비에 눅눅해진 이불솜이며,
여름 내내 밭이며 논가를 누비고 다녔던 아버지의 짙은 카키색 우비며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길다란 노란 장화며 옷가지들로
엄마의 부지런한 손끝 따라 여름이 길게길게 내 널렸다.
가는 여름이 아쉬워서일까
가을을 미리 반겨서일까
아님,
굵게 휘감긴 여름의 부피를
한꺼번에 걸친 빨랫줄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는지
간간이 엷은 물감 배인 잎사귀를 떨궈내던 감나무.
반쯤만 그늘진 마루 끝에 걸터앉아
문고판 세계명작을 보다가...엄마의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울자울 졸다가...귓가를 스치는 바람결에 살풋 떠진 눈으로
마당 한가득 온통 우리집 빨랫줄 위로만 쏟아져 내리는 것 같던
눈부신 햇살을 보다가...
이젠 빨래를 끝내고 아슬아슬 치마를 걷어올리고
몸을 씻는 엄마의 허연 속살에 눈이 멈추면
괜히 마음이 황망스러워 얼른 고개를 바지랑대 끝에 앉아있는
고추잠자리로 옮겨와 오래도록 딴청을 했는데---
당신의 지난한 삶을 대변하듯 새까맣게 그을린 무릎 팍 아래와는 달리
치마 말기를 한껏 끌어올린 허벅지는 부시도록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돌기까지 해서 철없는 어린것의 가슴에도 서늘한 바늘이 돋았다.
그것이 엄마한테는 넋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안나, 야야 지발 매가리읎이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정신 좀
바뜩 챙기라" 는 잔소리를 듣게 했다.
실쭉해서 일어나 하릴없이 그늘을 넓혀 가는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마당에 그렸던 그림들, 글씨들...
고단한 삶을 당신의 등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였던 엄마의 가을과 달리
조금씩 자리를 이동하는 그늘을 따라 앉은걸음으로 새겼던 나의 가을은
스레트지붕 위에서 말갛게 말라가던
붉은 고추의 선명함을 닮고 싶어했던 건 아닐까--
사람들은 말한다. 기억과 추억에 대해서--
기억의 속성이나 추억의 속성이나
지나간 것에 대한 반추고 투영임에는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살면서 모든 걸 잊어도
유년시절에 채색되었던 빛깔은
그 어떤 세월의 혹독함에도 시간이 갈수록 선명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우리는 이미 일생의 반은 어린 시절에 다 살아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산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라 했던가.
어느 작가는 두려움을 하나씩 걷어내는 과정이라고도 하더만...
내게 있어 산다는 것은 아직은,
시간이 비처럼 음악처럼 쏟아져 내리던 그 가을마당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이다.
초추의 햇살은
그래서 사람을 팽팽한 현처럼 조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