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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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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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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왔어요


BY 최지인 2005-04-02

그런 적 있는지요
누군가에게 속울음 덜어내고 싶은데
마땅히 드러내 보일 대상이 없어 혼자서 마음 속 곪은 부위만 넓혀 가는.

 

속내 한 번 제대로 털어놓을 친구도 없이
여적 뭐하고 살았나 싶어 은근히 부아를 내다보면
늦게 서야 내 모자란 그릇이 들여다보여 괜히 헛웃음 짓게 되지요.

 

그러다 짚이는 것이 학창시절의 그 푸르던 웅덩이입니다
고인 듯, 그러나 결코 머무름으로만 있지 않은 찬란한 흐름.

 

한창 '마니또'라는 비밀 친구가 유행하던 때이기도 했지요
생각나시지요
밤마다 깨알같은 글씨로 촘촘히 채워 넣던 지면들.

무슨 할 말들이 그리도 많았을까요
궁금증만 증폭시키고 야릇한 설레임만 던져 주던 금기 같던 사랑,
학교 잔디밭 위에서 손가락이며 클로버 잎을 동원해가며 걸었던 영원한 우정,
수업 내용보다는 온통 마음이 분홍빛으로 물들던 짝사랑하는 선생님,
어느 곳에서도 없을 것만 같은 햇살이 내려앉던 교정의 빛나는 풍경들,
집에서 보일 듯 말 듯 감지되는 불편한 분위기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불안,
하교 길 골목에서의 단골 분식 점에서 가격보다 턱없이 큰 핫도그 맛에 대한 비평,


.
.
.
하나 숨김없이 빽빽하게 털어놓던 속 얘기에 밤 깊은 줄 몰랐지만
다음 날 비워놓은 한쪽 면에 친구가 채워줄 답장을 미리 짐작하며
설레임으로 벌써 저만치 앞서 달려가던 새벽.

 

이젠 감성이 너무 늙어버린 걸까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때의 순수함,
그 거짓없이 바닥을 드러내 보이던 맑음은 없네요
다만
느낌이 실제보다 더 확실해지는 본능적인 예감만이 점점 키를 키울 뿐.....

 

다들 걸어온 삶의 궤적이 틀리듯
세상을 읽어내는 방법 또한 각각이겠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이렇듯 인정을 나눌 수 있는 울타리에 대한 공감대만큼은
모두가 원하던 수순이었음이 어쩌면 같은 시기를 지나왔다는
또 하나의 위안으로 자리할 수 있을까요.

 

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컴퓨터 옆에 놓인
국어사전을 뒤적거리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드문드문 쪽 사이에 박혀있던 단풍잎이 쪼르르 달려나와
잊어버렸던 시간들을 불쑥불쑥 눈앞에 들이댑니다

그리곤 살며시 속삭이듯 그럽니다
"난, 한 번도 널 잊어본 적 없어. 한 번도 내 시선 안에서
널 내려놓은 적은 더 더욱 이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오도마니 한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을 마른 낙엽.
그 거부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 .

 

마르고 바래서 이젠 제 색깔은 날라 간, 점점 더 선명해진 잎맥만이
헐떡이는 숨을 겨우 지탱한 안타까운 눈길에 대한 미안함과 당혹감
아마도 전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건너 온 세월의 강을 보았던 걸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우린 낙엽처럼 그런 소중한 마음들을 고스란히 안고 싶기에
여기 이렇게 그 오래된 기억들을 싸 가지고 와
그대로 연장선상에 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의 기억이
작정이나 한 듯 왕창 쏟아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속에 내 자신을 갖다 놓고 하염없이 허우적거리는 주인공이 되 보기도 하는.

 

예전처럼 그런 쪽지 편지는 아니어도
이런 우리 아줌마들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늑한 둥지.

님들에게 일일이 마음 새긴 편지 한 장씩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지는 못하지만
제 가슴 속 따끈하게 데워진 햇살 조각만큼은
아주 공평하게 잘라서 봉투마다 넣어둡니다.

 

작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