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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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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빛깔


BY 최지인 2005-04-01

아들 녀석이 6학년 올라가면서

학교에서 생활조사표를 가져왔다.

 

간단한 가족 상황과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기본 사항을 적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 이런 항목이 있었다.

 

가장 기뻤던 일과 가장 슬펐던 일 한가지 씩 적기.

 

아들은 가장 기뻤던 일을

가족과 함께 정동진 일출 여행을 떠났던 것으로 꼽았고

가장 슬펐던 일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일>이라 적었다.

그리고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린 흔적.

 

자신이 채우고도 남아 있던 빈칸을 엄마한테 미루는데

그 종이를 받아들고 나 또한 그 얼룩이 있는 자리에 눈이 멈춰

덩달아 마음이 아렸다.

 

어른인 내가 받아들이는 죽음의 무게와

아이인 녀석이 받아들이는 죽음의 색깔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건 2학년 때였다.

죽음이란 단어를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다가 실질적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 어리긴 했지만 장손이라는 피해갈 수 없는 자리.

 

마냥 철없던 아이가 할아버지가 묻히실 선산에서

하관전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자리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똑똑하게 보아둘 것이라 고집하더니..

 

망자의 얼굴에 사뭇 고운 미소마저 어려있었지만

녀석이 감당하기에는 슬픔의 무게는 너무 컸었나 보다.

 

때문에 받았던 충격의 부피보다

죽음에 대한 구체적 실감이 녀석을 이른 나이에 철들게 했다.

그 즈음 아이는 그림을 그리면

유난히 회색을 많이 썼다.

본능속에 내재된 어떤 충격이 그런 형태로 나타났었나 보다.

 

오랜 세월 병석에 계시다 가신 할아버지라

녀석은 '아프다'는 말에 유난히 예민하다.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부턴 늘 내 주위를 맴돌며 온갖 심부름을 다 시키라 한다.

게다가

자신이 조금만 아프거나 놀다가 생채기 난 것조차

지나치다 싶게 민감하게 반응한다.

 

처음엔 그런 아이가 염려스럽다가

이제 4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니

오히려 내가 슬그머니 기회를 만들어 아이의 마음을 떠볼 때가 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조금은 아이에 대한 심적 긴장을 풀어 놓고 있다가

며칠 전 저녁처럼 아이로 인해 후드득 마음이 뜯길 때

그런 내 자신을 채찍질로 닦아세우게 된다.

아직도 아이에게는

'죽음'이란 회색빛 우울한 충격으로 새겨져 있음을..

 

죽음..

종이 하나 살라버렸을 때의 가벼움- 젊은 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니다. 결코.

 

누군가에게 죽음을 설명할 때

아주 진지하게 전, 후 야기되는 여러 예를 들어가면서

서로의 의견을 진지하게 나눌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삶이 있는 한

한 쪽 땅을 미리 마련하고 기다리는 자리이지만

그 때문에 예정된 시간에 떳떳하게 가 닿기 위해서

하루하루가 마지막의 문턱인 듯 절절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