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게 가라앉은 하늘을 등에 업고 산에 올랐다가 눈발을 만났다.
그 순간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만 혼자서 새기는 감상 또한 남다른 묘미다.
쌓이지는 못해도 흩날리는 눈송이를 두 손벌려 받으며
깊은 잠에 빠졌던 추억의 세포를 깨워 본다.
바람에 사선으로 달려드는 눈송이 하나 하나가
자잘한 기억의 입자들이 되어 촉촉이 가슴을 적신다.
산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라 했던가.
까맣게 잊고 살다 문득문득 어떤 길목에서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 나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 분절되고 훼손된 지 오래인 그리움을 불러내 주는 무엇.
다시는 누릴 수 없기에 그 아득함만큼이나 깊이 저장되어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유년의 마당 가득 소리 없는 눈발들이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리면
머리에 털모자를 푹 눌러 쓴 어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찍부터 서둘러
커다란 가래를 바삐 움직여 동네 입구로 들어오는 신작로부터 뚫었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우리네 인정이 여지없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골목마다 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허연 입김을 내뿌믄 아저씨들의
푸근한 정담이 오가고 그 뒤를 싸리비 들고 시늉만 하는
무수한 꼬마들의 발자국들이 춤을 추었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서 서로 마주보며 눈을 치우다 보면
더도 덜도 아닌 꼭 중간쯤에서 서로가 만나졌다.
요즘처럼 자신의 집 앞길만 겨우 치워놓고도 세상 일
혼자 다 한 것처럼 남 손가락질 해대며 으스대는 사람이나,
반상회의 독려 반 강제동원 반으로 어쩔 수 없이 나와서
그것도 할당된 몫만 겨우 구겨진 인상으로 치우고도 뒤도 안 돌아보고
휙 들어가 버리는 사람들의 메마름과는 달리 아무 계산 없는
순박한 인정이 당연지사로 여겨지던 그 때였다.
오가는 사람들의 편리부터 먼저 챙기고야 내 집의 눈을
한쪽으로 높다랗게 쌓아올리고 나면 땀과 눈으로 후끈히 젖은
아버지의 등줄기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작은 힘이나마 열심히 거들면 흡족해진 아버지의 선심으로
마당 귀퉁이엔 동그란 이글루 눈 집이 세워졌다.
또래 조무래기들과 마당 가득 눈사람도 대 여섯 만들어
곳곳에 세워 놓고 작은 눈덩이를 뭉쳐
눈 집 문을 닳도록 드나드는 악동들에겐 하루해가 턱없이 짧기만 했다.
눈발이 그치고 한낮의 따스한 햇볕이 내리 쬐면 천지에 덮인 눈들이
일제히 보석을 박은 듯 반짝이기 시작하고 지붕에 덧댄 차양에서는
수정 같은 고드름이 물방울을 똑똑 떨구다가
지붕 위에서 녹아 내리는 눈과 함께 좌르르 쏟아져 내렸다.
지붕 위에 눈이 다 녹아 없어지기까지는 늘 아침에 눈뜨자마자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처마에 고만고만하게 달린 고드름이다.
햇빛이 투과하면서 만들어내는 영롱한 물방울이
순간 천사가 옆에 와 흘리는 눈물인 듯 저절로 두 손바닥을 펼치게 했다.
처음엔 손바닥 위에 느껴지는 간지러운 듯한 감촉에 온 몸이 기분 좋은 여유를 누리다가
조금 있으면 손이 시려와 손바닥의 면적을 최대한 이용하는 꾀도 부리다가
나중에는 얼얼하다 못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어쩌지 못해
다리가 꼬이고 몸이 뒤틀려졌다.
형제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서 누가 오래 버티는지 내기를 할 때면
동상을 염려한 엄마의 호통이 부지깽이를 앞세우고 부엌에서 달려나와
모두에게 공평한 승리를 안겨주곤 했는데 다들 겉으론 아쉬운 척 하면서도
속으론 '흐유, 죽는 줄 알았네...' 하는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며
엄마에게 슬쩍 고마움의 눈길을 보냈다.
햇살의 무게가 느껴질수록 마당가에 세워 놓은 눈사람도 점점 작아지고
솔가지로 붙여놓은 눈썹을 한쪽만 아슬아슬하게 달고 서 있던 눈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가슴 안에 커다란 구멍을 내기도 했다.
조금씩 슬픔이란 걸 알아가던 겨울날의 정취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뚝 부러져 내리는 솔가지를 보며
지울 수 없는 선명한 색깔의 비망록을 더해 갔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어렵게 새기던 어린 가슴은 마당가에 눈 집마저 허물어 내리는 순간
'왕' 참았던 울음을 서럽게 놓았던 것도 같다.
눈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독립된 공간으로 소중하게 남아있는 고요한 풍경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첫발자국을 찍을 때 왠지 마음을 가다듬어
들이 쉰 숨을 고르고 헛기침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경외심으로 다가오는
색깔의 가르침이다. 바쁜 삶을 사느라 늘 종종거리며 사는 우리들에게
가끔씩은 멈춰 서서 가뿐 숨도 고르고 하늘도 한 번 쳐다보라고 내리는 게 눈이 아닐까.
잠깐이라도 눈을 핑계삼아 자신이 내지르는 탄성의 목소리도 들어보고
억눌렸던 설움들일랑 흩날리는 눈에 실어보내기도 하라고 말이다.
흔히들 눈을 대표하는 말로 '순수의 미학'이라 일컫는다.
굳이 미학이 아니어도 좋다. 가끔이라도 선물처럼 눈이 내린다면
그 눈을 고스란히 안고 유년으로 달리고 싶다.
비록 맞바람에 숨이 막힐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