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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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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1


BY 최지인 2005-04-01

살을 에이는 바람이 겨울임을 실감하게 한다.

굳이 물기 고였던 곳에 하얗게 언 얼음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웅크린 어깨와 주머니를 찾아 꼭꼭 숨은 손이 말없이 겨울을 대변해 준다.

후미진 골목마다 허연 김이 솟아오르는 포장마차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고 몇 사람쯤은

옹송거리고 서서 뜨겁다는 핑계로 후후 불어대는 어묵 국물에 삶의 고단함을 날리고 있다.

 

여기 저기 따끈따끈한 붕어빵이 시린 손끝 사이로 건네 지고

겨울이면 빠뜨릴 수 없는 군밤, 군고구마도 추억의 냄새를 퍼뜨리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쯤 되면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지 않는 한 발걸음은 저절로 추억을 향해서 가기 마련이고

군밤 한 봉지, 군고구마 한 봉지로 풍족해진 마음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껏 여유로와 진다.

식구들과 둘러앉아 손끝에 까맣게 묻어나는 추억을 베어 물며

잠시 촉촉해지는 눈가로 아름다운 그림이 스쳐지나간다.
 

시골의 눈 오는 밤은 잠결에도 하얀 기척이 느껴진다.

그런 다음날은 유달리도 일찍 눈이 떠졌고 눈썰매에 대한 기대로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는 추위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비비며 댓돌을 나서면 이미 꼬마들의 신나는 하루를 위한 준비로

아버지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헛간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비료 포대가 두둑이 넣은 짚단으로

잔뜩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신의 역할을 기다리고 있는 아침.

짚단을 깔고 앉은 처마 밑 아버지의 입에 물린 담배는

발 미끄럼 방지를 위해 가늘게 꼬아지는 새끼줄 위에 저 스스로 떨어져 내린다.
 

밥숟가락이 패 동댕이쳐지듯 밥상 밑으로 나동그라지고

문살이 부서져라 튀어나가 넘어지고 구르기도 하면서 산비탈을 달려 오른다.

앞산 저 높은 산 구릉에서부터 차례로 줄을 서서

야호! 소리치며 좌~악 미끄러져 내린다.

감추어진 짜릿함이 온 몸의 세포를 깨워 함성을 내지른다.

온 세상이 내 것인 것 같고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듯한 착각에

시간을 잊은 동심이 눈 속에서 날개를 단다.
 

점심때도 훨씬 지나 저 멀리 아버지가 손 나팔을 만들어 소리를 지르신다.

순식간에 허기가 밀려오지만 조금만 더,가 벌써 몇 고비를 더 돈다.

이제는 부엌문 쪽에서 엄마의 부지깽이가 야단이다.

조금 더 지체하면 밥 얻어먹기는 글렀다.

그래도 한 번만 더 하는 미련이 벌써 발길을 산등덩이로 이끈다.

수없이 오르내린 발자국들이 작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누군가 일부러 넘어져 미끄러지자 종종거리며 나란히 올라가던 균형이

순식간에 도미노의 웃음을 만들어낸다.
 

햇살이 벌써 정오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점심때를 알리던 비행기 꼬리도 벌써 기억에서 멀다.

기다리던 아버지가 부엌 아궁이 속에서 알맞게 익은 군고구마와

자식 머리 수대로 구운 군밤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 갖고 휘적휘적 올라오신다.

군밤 하나를 머리 꽁 쥐어박히는 꿀밤으로 맞바꾼다.

그래서 더 아껴 먹고픈 군밤은 주머니에 소중하게 보관한다.

 

이미 젖어버린 장갑을 휙 벗어 던지고 빨갛게 곱은 손으로 다투어 고구마를 집어 든다.

눈 위에 살짝 굴려서 벗겨먹는 군고구마가 입 속에서 춤을 춘다.

하~ 호~ 뜨거움을 하늘 향해 뱉어내며 먹는 멋 또한 달디달다.

입 터져라 집어넣고 또 다시 구릉을 오른다.

숨이 턱턱 막힌다 싶었는데 목이 막힌 거다.

손에 집히는 대로 눈 한줌 입에 털어 넣는다. 꺽꺽 막히던 목이 트인다.

'휴~ 죽을 뻔했네, 다행이다' 소리는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가슴을 탁탁 쳐대는 형제들의 표정이 이미 다 그러하니까.
 

발자국으로 닦아 놓은 길에 작은 나무의 그루터기와 마른 풀 밑동이 살짝 드러난다.

은근한 햇살의 미소가 한 몫 단단히 했나 보다.

이젠 너덜너덜해진 비료포대를 들고 잠시 망설인다.
산등성이에서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집을 본다.

오후를 비스듬히 걸친 햇살이 처마 밑에

수정같이 긴 고드름을 만들어 놓고 온통 반짝이는 은빛 세상을 두르고 서 있다.

점점이 물방울이 떨어지는지 밤에만 찾아오는 별빛이 드러난다.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내려다보는 목 뒤로 오소소 소름이 인다.
 

산골의 저녁 어스름은 삽시간에 찾아온다.

약속이나 한 듯 집집마다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른다.

쪼르륵 배속에서 요동을 친다. 잊었던 허기가 물밀듯이 밀려든다.
 

얼얼하다 못해 가려운 엉덩이를 문지르며

다 닳아서 헤어진 비료포대에 마지막 체중을 싣는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들어선 마당에서

익숙한 집 냄새가 그리움같은 울컥함으로 와락 달려든다.

눈이 녹은 신발은 마음을 대신해 체온으로 인한 김을 폴폴 피워 올리고

후줄근하게 젖은 옷에선 차마 속으로 삼킨 반가운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뿌연 수증기를 두른 가마솥에서 설설 끓은 물로 한바탕 씻김 잔치를 하고

방으로 쫓겨 들어가면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 두신 콩 자루가 우리의 발을 기다리고 있다.

콩 자루 속에서 발장난을 하면서 내일은 무슨 놀이를 할까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는 구구들이 시끄럽다.

시꺼멓게 구들장이 달아서 엉덩이에 불이 날 것 같은 느낌에

서로 윗목으로 도망치다 콩 자루를 뒤집어 한 바탕 난리도 떨지만

그러는 동안 염려하던 동상은 저만치 달아나 있다.
 

저녁상이 들어오기 전 임시요깃감으로

이번에는 우리들 머리통 만한 고구마를 툭툭 잘라 찐 고구마가

양푼 가득 담겨 들어오지만 그 역시 질리지도 않는다.

살얼음 살짝 낀 동치미 국물에 머리만 잘라낸 김치를 맨손으로 집어먹는 맛 또한 별미다.

길게 고개를 젖히고 입안으로 빨아들이는 김치 쪼가리에 하루의 저녁이 내려와 앉는다.
 

부엌에선 화로에 담기고 남은 불기 앞에 젖은 신발들이 조르르 앉아서 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