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길, 가뜩이나 밤눈 어두운 사람은 종종거리는 걸음보다 마음이 바쁘다.
쌀쌀한 바람을 버티느라 한껏 움츠린 고개도 모자라 어깨엔 뻐근하도록 힘이 들어간다.
눈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앙상한 겨울나무를 보는 듯 까칠해 보인다.
신호등을 앞에 두고 잠시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어느 새 허연 입김을 피워 올리는 사람들이 옆으로 늘어선다.
'입김을 많이 피워 내는 사람일 수록 정이 많다'던 글귀가 떠올라
슬며시 내 입김의 부피를 재어 보며 눈치껏 다른 이들과 비교를 해 본다.
이 세상에는 아직 참 많은 인정들이 숨쉬고 있구나 싶어
흡족한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 비슷비슷한 높이의 기다림들 사이로
난데없이 아이의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허리쯤에서 울린다.
"엄마, 저기 좀 봐! 내가 아까부터 봤는데 있지,
자꾸만 저 달하고 별들이 내를 따라온다".
순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가
다시 아이에게로 가 머문다. 다들 입가에 달처럼 둥근 미소가 걸려있다.
예닐곱쯤 되었을까. 아니, 더 어린것도 같다.
목도리를 돌돌 감고 엄마 손을 꼭 잡은 아이는
추위에도 앙 다문 입술이 앵두처럼 빨갛다.
온통 물음표로 꽈 차 있는 세상에 대한 아이의 열망처럼.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표현에 걸음마다 달려들던 추위가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예전 우리 딸애가 고만고만했을 때,
무더운 여름 날 해를 따다가 쓰레기통에 구겨 버릴 거라
억지부리던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그 아이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적당한 설명을 끌어내 이해를 시켜주려 애를 쓰던 생각이 나
그 아이의 엄마는 뭐라고 답을 할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고마 시끄럽다마. 파란 불 들왔다. 손 꼭 잡고 빨리 따라 온나.
니는 밖에만 나오믄 뭐시 그리도 할말이 많아쌓노. 어이?"
기대가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다.
등뒤엔 젖먹이를 업고 한 손엔 기저귀며 우유 병이 들었을 가방을,
한 손엔 아이를 잡고 있는 여인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겨울처럼 메말라 보인다.
아무리 현실의 냉혹함을 변명으로 삼는다 해도 아무렇지 않게 이해하기엔
같은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많이 부끄러운 심정이다.
길을 건너가면서 그 아이 엄마를 뒤돌아보던 몇몇 사람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에서지 싶다.
아이를 거의 강제로 끌다시피 저만치 사라지는 그네의 뒷모습에서
언뜻, 어디에도 정 붙일 곳 없는 겨울의 뒷모습을 본 듯 마음이 서늘하다.
입안 가득 모래 바람이 서걱이는 심정으로 오래도록 바라보며
혹여 아이가 받았을 상처가 염려됨은 나 또한 두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리라.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는 버릇이 생겼다.
어떤 한 사람을 고스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방법들이 동원된다.
그 사람의 의식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얼굴,
그 사람이 세상을 살아낸 방식인 마음의 표정이자 현실이었을 손,
허울에 불과하지만 몸을 감싸고 있는 옷차림 같은,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싶은 세상의 잣대로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가장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내밀한 무의식마저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뒷모습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직 그런 마음의 눈을 가지진 못했지만
유독 쓸쓸한 겨울의 냄새만은 이상하리 만치 예민하게 감지되곤 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 뇌리에 각인된 기억들이 겨울을 배경으로 남아있어서이지 싶다.
젊은 날, 며칠 내내 계속된 폭설을 안고 교육 떠나는 딸자식을 위해
허리까지 차이는 시오리 길을 당신의 맨몸으로 뚫어주셨던 아버지.
훈기와 땀으로 흠뻑 젖어 온몸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며
소진한 힘을 애써 추슬러 휘적휘적 걸어가시던 당신.
정작 돌아가는 길이 더 멀다는 걸 몰랐던 나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무연이 바라보며
그저 부모의 자리를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수한 인생의 겨울 길을 걸을 때마다
어쩌면 누군가 먼저 치워놓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어느 날 내가 똑같은 입장의 길을 가면서
칠순 잔치를 계기로 보아버렸던 쓸쓸한 아버지의 뒷모습.
거기엔 술 힘을 빌어서 표현 못한 당신의 사랑을
딸의 볼에 꾹꾹 찍어대던 아버지의 용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작은 몸피에 조금씩 자리 잡는 노인 냄새에
익숙해지려는 안타까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바람 소리 같은 한숨조차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애써 감추는.
밑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서러움 같은,
그 죄스러움에 울컥하는 마음을 들키기 싫어 등뒤에서 말없이 당신을 껴안았을 때,
이미 늙은 당신은 나무 등피 같은 손으로 말없이 내 손을 다독거리셨다.
속으로만 수없이 쏟아냈던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이내 알아들으시고는
그래 되었다고, 니 마음 다 안다고 대답하던 아버지의 선량한 손.
그냥 들렸다, 마음으로......
부모라는 존재가 가슴속에 얼마나 깊은 동굴을 지니고 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네 속성은 자신이 그 자리에 서 보고서야
뒤늦은 회한으로 가슴을 친다. 그나마 뒤늦게 알았어도
부박하고 신산한 삶을 핑계로 억지 변명의 위안을 삼기도 한다.
늦은 저녁 길에 보았던 그 꼬마의 엄마가 아이를 토닥이며 잠재우는 손길에
아름다운 하늘의 얘기를 많이많이 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행여나 아이에게도 달라붙었을 겨울의 서러움일랑은
금세 잊어버리고 예쁜 꿈꾸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