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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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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자락 단상


BY 최지인 2005-04-01

12월의 첫날이다.
열한 달의 부피를 홀가분하게 덜어낸 달력이 그러나,

미처 이루지 못한 많은 사연들의 무게로 힘겹게 걸려 있다.

찢어진 달력의 휑한 초라함이 초겨울의 바람인 듯 스산한 기분을 몰고 온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았노라 자부하면서도 늘 이 시점이 되면

안타까움과 미련이 먼저 자리함은 사람이기에 돌아보게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도 한 몫 하겠지만, 계획에 대한 결과의 미흡함 때문에 오는

자괴적인 반성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리라.

무리한 계획으로 이루지 못한 현실은 늘 그렇듯 후회의 그늘을 만든다.
 

언제나 그렇지만 새해를 맞이하면서 내가 가장 비중을 두는 다짐은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 안에 숨은 깊이와 높이를 보는 시각을 길러라>

라는 나름대로의 경험에 의한 삶의 철학이다.
 

스물 세 살의 철없던 시절,

나에게 삶의 숨겨진 부분을 가르쳐 주셨던 소박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은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서신을 주고받는 인생의 스승이시다.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때아니게 닥친 12월의 초겨울 한파는 사무실의 온풍기를 있는 대로 작동시키게 했다.

안과 밖의 기온 차로 인해 창에 서리는 성에를 바라보며

조금씩 밀려드는 졸음을 쫓으려 객장에 비치된 커피 한잔을 빼들고

향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보기에도 얼굴빛이 수척한 듯 옷차림마저 허술한,

온통 얼굴이 수염으로 뒤덮인 어떤 아저씨가

옆구리에 커다란 가방을 끼고 성큼성큼 들어오셨다.
 

시간상으로 점심 교대를 하느라 자리를 비운 직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근무하는 직원들도 그저 한 번 그 분을 일별 하듯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아무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건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었다.

근무하면서 몸에 밴, 사람을 옷차림으로 판단하는 근성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리고 실지로 그 잘못된 잣대는 무난히 들어맞았었기에

그 날도 다들 무심으로 일관하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뭐, 동전을 교환하러 오셨거나 대출금이자 정도 내러 오신 분이겠지 하는

일상적인 생각으로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어리석음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때로 예외는 있는 법이고 그 예외로 인하여

우리는 자신이 세상을 살아오던 방식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절감하고

하여, 뼈아픈 반성의 수정안을 추가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거액의 돈을 갖고 그

것도 이미 몇 차례의 전화 상담을 거쳐 찾아오신 분이었다.

전화 상으로는 그리도 친절하게 응대하던 직원들이 행동으로 보인 우매함 앞에

실망하던 그 분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차라리 날카로운 일갈을 던지고 돌아섰다면

오늘날 나의 삶에 반성의 목록이 추가로 기록되지도,

인생의 스승님 또한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성자는 스스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 했던가.

실망감에 분명 처음엔 노여웠을 감정을 애써 누그러뜨리고

오히려 겸손한 태도로  돈 가방을 우리 앞에 끌러 놓으시던

그 분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이라니!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시종일관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시던 그 분은

삶을 가장 정직하게 살아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성품과 온화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파장을 선물해 주셨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존경심보다도

사람으로서 진정 부끄러움의 감정을 느낀다면 바로 이런 경우이겠구나

싶은 마음이 먼저 들게끔 하던 그 분 앞에서 우리 직원 모두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서로가 각성의 무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술렁거리던 사무실 분위기가 차츰 숙연해 지기까지 했던 그 날.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며 우리의 잘못을 넉넉한 웃음으로 받아주시던

그 분에게서 풍겨나던 정감 어린 눈빛이 모두에게 던져 주었던 교훈,

바로<세상의 잣대를 단순히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하지 마라.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
 

새삼스럽게 떠벌려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밑에 선 이즘이면

그 분의 따스하고 넓은 마음과 함께

꼭 한 번씩 되새기게 되는 화두가 바로 사람의 세 가지 유형이다.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없으나 한 사람, 없어야 할 사람으로

세분된 기준에 과연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할까란 질문을 던지다 보면

실지로 내 생활의 행동 반경에도 스스로의 절제와 반성이 따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상처를 입히는 상대가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의 말과 행동일 때가 더러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노라

아무 거리낌없이 자부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살면서, 알게 모르게 내가 뱉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거나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은 없는지,

사람을 대할 때 겉모습에서 보여지는 풍족함보단
초라해도 진정 마음에 들어있는 인격과 품위의 아름다움을 읽으려 했는지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해 볼 일이다.
 

그래서일까.
 해거름 녘, 다분히 의도적으로 애잔하게 소멸하는 저녁놀을 본다.

하루 동안의 그 광휘롭던 빛의 명멸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언어로 녹아 내린다.

아슴해 지는 마음 한켠으로 그리운 사람들과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무슨 말로 어떻게 한해 동안의 인사를 건넬지 머릿속이 마냥 분주해진다.
 

그 분들에게 봉인되어 있던 내 사랑을 조금씩 풀어

딱딱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은, 나만의 따스한 마음을 새긴 편지를 쓰리라.

그 편지 속에는 가다가 부서질지언정 노란 은행잎도 몇 개쯤 넣어서 말이다.
 

요즘의 우표 값이 얼만 지도 알게 될 테고

한 번쯤은 숨을 가다듬고 마른침을 삼키는,

우체통 앞에서의 그 떨리는 듯 행복한 설레임도 느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