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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에 대한 단상


BY 최지인 2005-04-01

때로 살다보면 색깔로 말을 걸어오는 것들이 있다.
각각의 몸짓은 다르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없이 형태를 달리하며 찾아오는..

그렇게 다가와 잊었던 감성을 살풋 불러내 주는 무엇,
거기엔 늘 자연과 닿아있는 향기가 있다.
바쁜 삶을 살아가느라 잃어버렸기보다는 잊었노라고
애써 태연한 척 한쪽에 내팽개쳐 두었던 소중한 기억들.
그 기억들을 다시 끌어내 잠시 영혼에 따스한 불빛을 쬐게 해 주는 신비한 묘약 같은 것.

내게 있어 유독 감에 대한 감흥이 남다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시골 집 마당 한 켠에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열망같은 색등을 주렁주렁 밝히고 있는 주홍빛 감.
가슴 먹먹한 그리움 같은 노을을 닮은 색채.
처마 밑 새끼 줄에 꿴 감으로 겹겹의 휘장을 둘러 두 손 모으고 마루에 서면
마치 내가 학예회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하던.
밤이면 하얀 달빛 아래 수천 개의 붉은 등이 시골이면 어느 집이건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밝혀져 마치 의식의 한 부분처럼 당당하게 빛을 발하던 노래.

빈집을 보다 속이 출출하면 이리저리 몇 번 망을 보고
돋음발을 해서 슬쩍 슬쩍 하나씩 빼먹던 곶감.
말라 가는 감은 당분이 배가되어 돋음발의 유혹은 오래도록 양심을 저울질했다.
빼먹은 감의 칸을 조금씩 넓히는 눈속임도 잠시,
아버지의 꿰뚫는 시선에선 벗어날 수 없어
어느 날 그만 하면 됐다는 말씀에 쥐구멍이 작은 게 원망스러웠고..

감은 처음부터 환상을 몰고 찾아왔다.
모내기가 한창인 5월이면 마술처럼 찾아들던 감꽃 향기.
이른 새벽이면 꿈결인 듯 헤집고 달려드는 달콤한 감꽃 향기가
미련스럽게 발목을 잡는 잠을 훌훌 쫓아냈다.
미풍으로 마루 끝에 떨어진 몇 개의 꽃들이 선득한 발끝에 와 입맞춤하고
얼른 댓돌로 내려서라고 등을 떠밀었다.
고개를 들어 뜰을 찬찬히 둘러보면 새벽보다 먼저 달려온 감꽃이
마당가 돌담 밑에 눈처럼 하얗게 쏟아져 내려
잠시 내가 천상의 어느 지점에 서있는 듯한 착각에 들곤 했다.
행여나 서둘러 향기가 달아날까 걱정스러웠는지
허리까지 잠기는 새벽안개가 그 위를 이불처럼 살포시 덮고 있었고...
그쯤되면 차마 발 딛기도 조심스럽고 숨 한번 고르기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마루 끝에 앉아 잠시 정물이 되고...조금씩 마당에 아침 햇살이 들어차면
감꽃 위를 스멀거리던 안개가 신비한 반짝임으로 부서져 내렸다.
조심스레 뜨락을 내려 서서 한 줌 밖에 남지 않은 안개를 향해 손을 뻗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허공에 고운 빛살이 내려와 따스한 너울을 추었다.
손바닥을 지긋이 들여다 보다 서둘러 몸을 움직인다.
이젠 내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었으니까.

치마를 여며 동그랗게 그러쥐고 부지런히 감꽃을 주워 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바늘에 길게 꿴 무명실에
한 개 한 개 감꽃을 끼워 긴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하루가 마냥 행복했다.
친구들이랑 폴짝폴짝 고무줄 놀이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재 너머 심부름을 갈 때도 목에선 감꽃 향기가 춤을 추었다.

마을 어귀에서 떠들썩하게 놀다 석양을 지고 모두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짓이겨지고 누렇게 색 바랜 감꽃은 더 달콤해졌다.
저녁 연기가 머리풀고 하늘로 올라가고
어스름을 몰고 오는 저녁 안개가 다리를 휘감으면 고픈 배를 움켜쥐고
하나 하나 빼먹는 감꽃에 어쩌면 개미 한 두 마리도 섞여있었을 터였다. 

감꽃이 지고 나서 작은 열매 맺은 연둣빛 감나무는 때론 형벌이기도 했다.
동생이랑 말다툼을 하거나 부모님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놓지 않았을 때
가차없이 벌로 떨어지던 불호령이 바로 죽기보다 싫었던 마당 쓸기였다.
꽤 넓은 마당에 감나무 잎이며 어린 감은 왜 그리도 끝도 없이 떨어져 쌓이던지..
그럼에도 가을에 먹게 될 홍시와 곶감에 대한 기대감이
그 고행 같은 벌을 잘 견딜 수 있게 하던 유년의 뜨락.

가을이 깊어지면 마당은 온통 빨간 단풍 천지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터질 듯 잘 익은 말간 홍시가 먼저 기침하신
아버지의 손끝을 거쳐 마루 끝에서 반사된 햇살을 토해 올렸다.
가끔씩은 딸에게 맞추어 작게 만들어 준 장대를 들고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감을 따는 호사도 누렸지만 한 두어 개 따면 팔이 아팠다.
밤이면 거둬들인 감을 깎느라 늦게까지 부모님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자장가가 되었다.
여분의 감을 남겨 뒤란의 큰 대바구니에 담아 사이사이

솔가리를 켜켜이 넣어 저장한 감 홍시는
겨울 내내 입을 즐겁게 하는 간식이자 별식이었다.

그 땐 참 귀하게만 느껴졌던 감이 이젠 그저 그런 과일중의 하나이겠거니 치부된다.
모든 게 넘쳐나고 흔한 요즘이기도 하지만 시절 따라 사람의 입맛도 변하기 때문이리라.
시장에서 한 소쿠리 사다 놓아도 식탁 위에서 줄어들지 않는 감을 보면서
내 소중한 기억이 방치되는 것 같아 괜한 상실감이 엄습한다.

추억의 속도는 늘 그 자리인데 삶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기만 하다.
삶에 있어 진정 소중한 것은 일궈내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순간의 여유와 여백을 즐기는 게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