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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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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가을


BY 최지인 2005-04-01

늦가을 밤, 낙엽이 뚝뚝 지는 거리에서 오빠는 하늘을 쳐다보며 그랬다.
"아, 보고 싶다. 아, 외롭다".
훤칠하니 키가 큰, 한껏 젖힌 오빠의 고개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결국은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 사이로 어른거리는 물기.....,
불혹을 훌쩍 넘긴 남자의 눈물이 가로등 불빛에 일순간 반짝이는 것을.
후두둑 가슴이 뜯기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양새는 그지없이 나무랄 데가 없는 중년의 가장인데
안으로는 텅 빈 마음을 추스릴 공간 하나 마련하지 못한 허허로운 영혼.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이젠 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만을 사랑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만큼 했으면 자신의 자리를 찾아도 누구든 뭐라 할 사람이 없건만
늘상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갇혀 끝없이 새로운 의무와 책임을 만드는 남자.
이럴 땐 모든 걸 옆에서 지켜봤기에
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는 내 자신 또한 싫어진다.

그랬다.
오빠에겐 영화 '친구'에서 보여지던, 내용은 틀리지만
맥락은 같이하는 보석 같은 친구들이 꼭 다섯이 있었다.
언제나 한 몸처럼 붙어 다니면서 '우정'이란 낱말을
이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소중히 여기던..../

농번기 때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장정 일을 거뜬히 해내어
부모님들의 자자한 칭찬을 받았고 시험기간 때는 독서실에서
선두를 다투는 선의의 경쟁을 했으며 한가한 여름 저녁이면
강나루 턱에 멍석 깔고 부서지는 달빛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타 반주에 맞추어 스모키와 비틀즈와 김정호를 노래했다.
그들이 그려내는 하모니에 강둑에 졸고 있던 많은 풀벌레들과
노란 달맞이꽃이 덩달아 뿜어내던 푸른 여름의 빛깔들을 바라보며
꿈 많은 소녀의 가슴에 노을 빛 아름다움으로 들어앉던 수많은 언어들은
지금껏 그 어떤 감동보다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현실은
언제나 시간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비웃는 것인가.
대학의 길을 가면서 서로의 행보가 정해지고
마음들과는 달리 조금씩 어긋나던 약속.
가난한 집안의 맏이였던 오빠는 때문에,
자신의 소신껏 지망을 하지 못하고 보장된 차선책을 택해야만 했고
누구는 군인의 길을 택하기도 했고 누구는 유학을 택하면서 엇갈리던 명암.
그리고 386세대가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질곡의 세월이 있었다.
데모로 점철되던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오빠가 치러내야 했던
사투와도 같았던 하루 하루들. 핏발 선 눈으로 파란 불빛을 뿜어내던
광기 어린 눈빛과 무턱대고 학생들을 호도하고 질책하던 아버지와의 갈등,
마당가 애꿎은 감나무만 주먹에 피가 나도록 쳐대는 오빠를
마음졸이며 바라보던 나, 부엌 아궁이에 한숨으로 날을 보내던
엄마의 가슴에 맺히던 멍울까지..... 그 모든 게 후일 고스란히
오빠의 짐으로 남았지만 아무도 그 몫에 대해 무게를 덜어주려는 사람도
덜어줄 여력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오빠는 그 모든 짐을 묵묵히 견디어냈다.
맏이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집안의 기둥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신은 잊었다. 죽어라 앞만 보고 달리는 사이
간간이 연락이 되던 친구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사는 게 바빠 연락한 번 주고받지 못할 정도로 오빠는 절박했음을 친구들은 알까.
오빠의 잦은 이사로 친구들은 뒷 북만치는 탐정 노릇을 하다
나중에는 지쳐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에 부딪혀 투쟁 같은 시간들을 살아내면서
그 꼿꼿하던 오빠는 이제 튀어나온 배를 집어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적당히 둥글둥글한 성격에 빛나던 눈빛 또한 서글서글하니 순한 양처럼
되었지만 살만 하니까 외로움이 덮쳐와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이제 와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자니 면목이 없어서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용서되고 이해되리라는 내 짐작은
오빠의 자존심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허전함에 밥을 먹고 또 먹어도 허기가 진다는 오빠.
어느 날부턴가 '친구'라는 문구만 눈에 띄면 그게 책이던, 음반이던, 옷이던,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나는
올케 언니의 하소연을 심심찮게 들어주어야 했다.
가끔씩 오빠 집에 다니러 가면 작은 서재 방에서
김민기의 <봉우리>와 <친구>를 연속으로 틀어놓고 짙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는 오빠를 보면서 절절한 남자의 고독을 절감한다.
빼꼼히 들여다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어 넘기면서
얼른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뒷모습마저 단단하게 여미는 오빠.
그 뒷모습에 짙게 배여 있는 허무를 읽어버려야만 하는 나.

온갖 쓸쓸함을 모아 태우면 그런 냄새가 날까.
오빠에게선 가을 냄새가 난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스스로 몸을 비우고 가벼워지는 시기.
그것이 가을에 숨어있는 쓸쓸한 정조(情調)의 실체이기도 하겠지만
몸 안에 바람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속을 비워내는 갈대처럼
힘들여 거둔 모든 것들을 가족들을 위해 남김없이 퍼주고도
늘 더 줄게 없음이 안타까워 애를 쓰는 오빠를 대할 때면
안쓰러움과 함께 그 위로 가을의 모습이 겹쳐진다.

지나간 바람은 춥지 않은 법.
그 모든 시련을 묵묵히 이겨냈듯이 이젠 오빠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 이젠 만면에 하회탈의 거짓 없는 웃음이 가득한 오빠를 보고 싶다.
"오빠, 때론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대. 자, 눈을 감아봐. 친구들이 보일 거야.
그리고 눈을 뜨면 그대로 걸어가면 돼.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