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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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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강


BY 최지인 2005-04-01

두터운 안개를 둘러
엷은 실루엣으로 보이긴 해도
아직은 그 형태가 살아있는 먼 산.
그 속에 발 푹푹 빠져가며 마음 딛고 싶은 날이다.

문득 어렸을 적 온통 안개로 뒤덮인
강을 건너다 잃어버린 내 구두가 생각난다.
위쪽과 아래쪽 두 군데 있던 다리 중 하나는 통나무 두 개를 연결시켜 놓아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하고 운치 있지만 건너려면 긴장감에 마음을 죄게 하는 다리였고
또 하난 숭숭 뚫린 구멍이 있어 발 밑으로 흐르는 물결을 내려다보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어질어질 중심을 잃게 하던 철다리였다.

싫던 좋던 하루에 몇 번을 건너야 했던 강.
오늘처럼 안개 잔뜩 낀 날이나 비 오는 날은 은근히 두려웠던 다리.
친구들이 실버들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쪽 나무다리를
힘주어 꼭꼭 잘도 밟고 지나가는 동안 겁 많은 내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선택한 쪽은
늘 철다리였다.
"야들아~~ 좀 천천히 들 건너라야. 같이 가아..기다려 알았지?"
왠지 팔에 좍 돋는 소름을 쓸어가며 그 말하느라고
위쪽 친구들을 향해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걸음을 놓는 순간
꼭 귀신에 홀린 것처럼 구멍 속으로 쏙 빠지던 발.
침착하게 발을 빼면 될 것을 지레 혼 겁을 먹은 나.
"엄마야~~ 아악, 나 좀 살려둬.."
급하게 발을 빼다 결국은 신발이 퐁당..!!

"옴마야, 있지 울 엄마가 그러는데 귀신은
겁 많은 사람을 쫓아 댕기믄서 올가미를 씌운다고 하드라.."
누군가 툭 내뱉은 말에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놀래서 걸음아 나 살려라 우르르 달아나고.....
누가 내 신발 하나 찾으려고 그 강물에 뛰어들꼬.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달래며 반쯤 지나 온 철다리를
엉금엉금 기다시피 되돌아 나올 때면
온 몸의 털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

징징 울면서 다시 집으로 가면 한창 들일 나갈 채비에 바쁘시던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좇아 나오시면서 속상함을 화로 푸셨다.
"이느머 지즈바, 잘한다 잘해..니는 어째 그래
간이 생기다 말았너. 어이..? 씨르빠 신고 학교 가던지 말던지..
아이고, 내 속에서 어째 저런 기 났을꼬..아이고 속상해서..."
야속하지만 엄마한테 혼난 것도 괜찮고,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까운 구두 잃은 것도
몇 번 눈물 끝에 미련을 접을 수 있을 것 같고,
학교 가서 간 팔아먹은 겁쟁이라고 놀림받는 것도 다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그 다리를 혼자서 건너가야 한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두려웠었다.
"엄마, 오늘 하루만 학교 안가면 안 돼? 응?
집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 되잖아..제발..".
"니가 지금 제 정신이가, 어이? 빨리 학교 안 가나.
죽어라 뜀박질해도 지각이다..부지깽이로 타작을 해야 이 엄마 말을 들을래.."
몇 번을 휘두르는 부지깽이와 숨바꼭질을 하다
결국은 콧물 훌쩍이며 학교로 쫓기듯 가야 했던 그 때.
엉엉 울음 놓으면 조금은 덜 무서울 것 같아 힘껏 목청 돋우어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다시 건넜던 철다리.
큰비라도 한 번 오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던 건
친구들이 자랑처럼 잘도 건너던 나무다리였다.
반면 머리 풀어헤치고 흘러 내려가던 온갖 풀들이 흉하게 걸린 채로
철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나마 중심 골절만은 남아있던 철다리는
내 못난 자존심을 살려주던 유일한 실체이기도 했다.

비 온 다음날은 오히려 좋았다.
매번 다리가 유실되었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동네 어르신들이
아침 일찍부터 나오셔서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거나 업거나 혹은 무등을 태워서
강물을 건네 주곤 하셨으니까.
거짓말처럼 온통 햇살로만 치장한 아침에
괴기스럽고 무섭게만 느껴지던 강물은 붉은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
맨살 드러내고 은빛 눈부심을 토해 올리곤 했다.
강둑 위에 좍 깔린, 물기에 젖었다 말라 가는
그 많은 조약돌들은 또 얼마나 이쁘게도 반들거렸는지.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를 골라 들 때의 그 살폿한 느낌이란..!
하루종일 돌멩이로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다가
만지작거리며 하늘로 던졌다 받기도 하다가 풀꽃도 콩콩 짓찧다가..
참 지치지도 않고 가지고 놀았던 것 같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엔 언제인지 싶게 온 동네 분들의 피땀으로
감쪽같이 그 자리에 다시 선 다리로 인해
자칫 끊어질 뻔한 기억이 다시 이어질 수 있게 하던 유년의 강.
이젠 모두 그리움 저편의 아득한 추억이다.
타지에 나갔던 자식들이 돌아올 때면
깨끗하게 단장된 시멘트 다리가 자동차 바퀴의 탄력 음에
조금은 밋밋한 미소를 지을 뿐.
결국 삶의 해석은 시대가 말하는 것인가.

추억이 기억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만 뭔가를 남기고 싶어한다.
비록 내가 남긴 지금이란 시간이 훗날 흔적도 없이 잊혀진다고 해도 지금은...
남기기 위해서 일단은 가두고 보는 것이다.
내가 안개 낀 산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는 지금,
다시 먼 시간을 예견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