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 놀이방이 새해를 맞아 일주일 방학에 들어가는 바람에 아이 둘다 시댁에 보내고 조용히 보냈다. 정확히 34개월만에 처음 얻는 고요함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도 하고 뭐도 하고 계획도 많이 세웠건만, 이불 빨래만 매일 하다가 드디어 마지막 밤이다. 큰 맘 먹고 남편에게 야간 영화 보러 가자고 했다가 퇴짜 맞고, 동네 앞 비디오 가게 가서 고르고 골라 빌려 온 것이 이 '청연' 이라는 영화다. 딴에는 기분낸다고 과자와 아이스크림도 사서 남편은 아이스크림 파 먹다가 골아 떨어졌고 베게 두 개 머리에 고이고 이불 덮고 2시간을 꼼짝않고 나 혼자 울고 웃으며 보았다.
주제를 향해 냅다 달리는 예전 영화와는 사뭇 달랐다.
박경원이라는 한 여자의 인생을 뒤에서 쭉 따라가며 지켜본 듯하다.
옆집에 불이 나서 발 동동 구르며 속태우며 보는 것이 아니라 강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히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속에서 오가는 감정은 다 나에게 정확히 전해왔다. 아주 객관적으로 말이다.
일제시대의 최초 여류비행사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감동어린 성공기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요, 한지혁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정희와의 삼각관계를 논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장렬하게 고문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11살 때 우연히 비행기를 타게 되어 비행사가 되는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이루려고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여 마침내는 훌륭한 비행사가 되었고 그러다가 어쩌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의 친구가 자기를 취재하러 왔다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남자 친구의 아버지를 쏘아 죽였고 오해받아 한참을 고문을 당하다가 애인의 거짓자백으로 풀려났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가슴이 아팠고 대륙횡단을 하기 위해 일장기를 타고 바바람치는 아타미 상공을 나르다가 죽었다.
이게 영화의 다다.
무심함 속에서도 이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무심히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일것이다.
크게 신념이니 뮈니 논할 필요없이 밥먹고 아이 학교 보내고 빨래하고 또 밥먹고 청소하고
아이 간식챙겨주고 또 밥먹고 설거지하고 자고 하는 반복되는 일상.
항상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양 호들갑을 떨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내기도 한다. 가만히 뒤에서 따라가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박경원이라는 한 여자의 인생을 무심히 지켜볼 수 있어 좋았고
'내 인생도 그렇게 무심히 바라볼 수 있다면 ......' 이라는 상상을 한 번 해 볼 수 있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