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푸르름이다.
봄은 설레임이다.
봄은 새로움이다.
그랬지. 그때는…
내 스물세해의 봄엔.
2월 졸업식,
3월 첫 출근.
그 3월에 학과장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학교에 갔다.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계속해서 일을 할 생각이라면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미대를 나오신 사모님이 전공이 다른 본인을 만나서 자기 일 못하고 사신다고.
같은 미술을 하는 사람과 결혼한 친구들은 자기 일을 계속 하면서 사는데…
나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을 남에게 기대어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생각했다.
계산된 것 같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남자들이 다 그렇고 그래 보였다는 거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 선배는 어쩐지 불안정해 보였다.
무언가 하나를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는 생각의 교만함이 나에게 있었다.
<나는 다 할 수 있다>
<같은 일을 하는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내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다>
<엄마, 아내, 며느리, 딸의 역할, 그리고 내 직업까지 아주 완벽하게…>
그런 교만함이었다.
그 교만함으로 인해
나는 큰애를 낳기 전날까지 일을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에
마지막 엘레베이터 운영시각 11시를 넘겨
만삭의 몸으로 불꺼진 13층의 계단을 혼자서 걸어 내려오기도 부지기수였다.
출근에 바쁜 며느리의 의무는
손빨래, 빨래널기, 설겆이였고
그래서 난 만년 지각생이었다.
시집갈 때 해 간 세탁기는
아이 둘 난 배짱으로 4년 후에나 쓸 수 있었다.
그래도 어머닌 세탁물 다시 건져
초벌 손빨래 하셔서 세탁기에 다시 넣으시는 바람에
비누때 때문에 세탁기 통을 청소한다, 통째로 간다 돈도 많이 들었다.
여자라서, 결혼해서, 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자존심과 일에 대한 책임감.
또한 바쁘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일의 성격상 매일 야근이었다.
둘째는 타고난 울보라서 친정으로 쫒겨났다.
야근을 하지 말던지 아니면 애를 친정으로 보내던지의 선택.
친정에서도 나의 출입금지가 내려졌다.
내가 왔다 간 날은 밤새도록 운다고 아예 오지 말라고.
직장생활 10년중 결혼후 5년은 그렇게 지지고 볶으며 다녔다.
그래, 교만이었다.
나는 엄마도, 아내도, 며느리도 딸도 제대로 된 직장인도 아닌
모든 부분에서 자격미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폭발 직전이었고 탈출구가 필요했다.
절실히. 아주 절실히.
그래. 부부가 같은 일을 했었다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졌겠지.
꿈이든 허무든 무언가가 존재하는
내 사무실 하나 내는게 그리 힘들진 않았을 거다.
물 설고 낯 설고 말 설은 이곳에서